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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의 현장] 이경미 박사가 기획한 ‘도시시작’…평창동의 길, 몸으로 다시 만나다

  • 권민정 기자
  • 입력 2026.09.25 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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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4회 자문밖문화축제서 참여형 도시 퍼포먼스 선보여…공간디자인 연구를 도시와 몸의 예술로 확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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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경미 박사가 기획한 ‘도시시작’ 평창동의 길, 몸으로 다시 만나다중 가나아트센터 계단에서의 머포먼스 모습. [사진=이경미 박사 제공]

 

늘 걷던 길도 걷는 방식을 바꾸면 전혀 다른 공간이 된다. 계단에서 몸을 돌려 하늘을 바라보고, 손끝으로 산등성이의 선을 따라가며, 오르막에서는 경사가 몸에 전하는 힘을 느낀다. 목적지를 향해 서둘러 지나쳤던 도시를 천천히 보고 듣고 만지는 순간, 평범했던 길은 하나의 작업실이 된다.


공간 실무자이자 연구자, 작가로 활동하는 이경미 박사가 기획·진행한 참여형 도시 퍼포먼스 〈도시시작: 움직이는 아뜰리에 EP.02〉가 지난 9월 15일 서울 종로구 평창동 일대에서 열렸다. 제14회 자문밖문화축제 ‘Art Passages 예술적 여정’의 ‘OOO ART WALK’ 첫 번째 루트인 ‘평창동 넘나들길’ 프로그램으로 진행됐으며, 안무가 서태리가 협업했다. 


이번 작업은 이 박사가 오랫동안 탐구해 온 ‘공간과 인간의 관계’를 도시 한복판으로 확장한 실험이다. 도시를 단순히 이동하거나 바라보는 공간이 아니라 몸의 움직임과 감각에 따라 새롭게 경험할 수 있는 장소로 바라본다. 계단과 경사, 식물, 건물의 윤곽은 물론 도시의 소리와 날씨, 우연히 마주치는 풍경까지 작품의 일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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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좌측 사진: 가나아트센터 데크 마당 / 가운데 사진: 토탈미술관 입구 / 우측 사진:  누쿠갤러리로 가는 길의 화단  [사진=이경미 박사 제공]

 

작품 제목인 ‘도시시작’에는 두 가지 의미가 담겨 있다. 무언가를 새롭게 시작한다는 ‘시작(始作)’과 시를 짓는 ‘시작(詩作)’이다. ‘움직이는 아뜰리에’는 예술가의 작업실을 하나의 건물에 한정하지 않고 도시 전체로 옮긴다는 뜻이다. 걷고, 멈추고, 만지고, 듣고, 몸을 기울이는 일상의 행동을 통해 익숙한 공간을 낯설게 바라보도록 하는 것이 작업의 출발점이다. 


이 박사는 완성된 작품을 관객에게 보여주는 대신 참가자가 직접 작품의 일부가 되는 방식을 택했다. 참가자들은 수신기로 전달되는 안내를 들으며 평창동의 미술관과 갤러리, 골목을 걸었다. 목적지에 빨리 도착하는 대신 그 과정에서 무엇을 보고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경험하도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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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좌측 사진: 삼세영 첫번째방 / 가운데 사진: 수에뇨 앞 오르막 / 우측 사진: 지도  [사진=이경미 박사 제공]
 

걷는 방법에도 작은 규칙을 더했다. 뒤로 걸어 오르고, 바닥의 돌만 골라 밟거나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방식으로 계단을 오르는 식이다. 모래를 밟아 소리가 나면 모두가 멈춰 3초 동안 박수를 치기도 했다. 익숙한 이동 방식에 작은 변화를 주면서 평범한 길과 계단을 새로운 신체 경험의 공간으로 바꿨다. 


가나아트센터 계단에서는 제비뽑기로 각자의 위치와 행동을 정했다. 같은 계단에서도 서로 다른 자세와 방향으로 움직이면서 참가자마다 공간을 바라보는 방식이 달라졌다. 데크 마당에서는 안무가 서태리와 함께 바닥에 몸을 눕혀 하늘을 바라보며 땅과 몸이 맞닿는 감각을 경험했다. 


토탈미술관 입구에서는 산등성이가 그려내는 자연의 선과 건물이 만드는 인공의 선을 손끝으로 따라갔다. 누크갤러리로 향하는 길에서는 식물을 조심스럽게 만지고 냄새를 맡았고, 삼세영에서는 유리창 밖 암반의 표면과 굴곡을 살펴본 뒤 그 느낌을 가슴과 등, 어깨의 움직임으로 옮겼다. 수에뇨 앞 오르막에서는 몸을 기울이며 경사가 몸에 가하는 힘을 직접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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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좌측 사진: 출발의 단서 / 가운데 사진: 거리에서의 움직임 / 우측 사진: 옆으로 걷기 [사진=이경미 박사 제공]


여정의 끝에서는 같은 길을 걸은 참가자들의 서로 다른 경험이 하나의 지도 위에서 만났다. 각자가 기억에 남은 생각과 느낌을 글로 적고, 눈에 남은 장면이나 형태를 선으로 그린 뒤 이동 경로가 표시된 지도 위에 겹쳐 놓았다. 함께 걸었던 하나의 길이 각자의 감각과 기억이 포개진 ‘몸의 지도’로 다시 만들어진 것이다. 


이번 퍼포먼스는 지난해 같은 축제에서 선보인 EP.01에 이어 진행된 두 번째 작업이다. 이 박사는 같은 형식을 단순히 반복하기보다 새로운 동선을 선택해 장소에 따라 달라지는 몸의 경험과 우연한 사건을 작품 안으로 끌어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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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좌측 사진: 옆으로 걷기2 / 두번째 사진: 수에뇨 앞 오르막 / 세번째 사진: 길 위의 간격 / 우측 사진: 다시 팔각정 마무리 [사진=이경미 박사 제공] 

 

이경미 박사의 작업에는 오랜 공간 실무와 학문적 연구가 함께 녹아 있다. 그는 약 20년 동안 주거·상업·업무·공공문화공간의 기획부터 설계, 시공, 감리까지 현장에서 경험했으며, 약 15년간 사업체를 운영했다. 인쿱스인테리어협동조합 초대 이사장과 도시재생 코디네이터, 국가건축정책위원회 청년위원으로도 활동했다. 또한 국민대학교 테크노디자인전문대학원에서 박사과정을 마쳤으며, 한국ESG경영 최고위과정도 수료했다. 공간을 물리적 구조물에 머물지 않고 사람과 사회, 도시의 관계속에서 바라보는 그의 관심은 실무와 연구를 거쳐 예술 작업으로 이어지고 있다.


연구자로서 이 박사는 석사 과정에서 노스탤지어를 통해 기억과 시간이 동시대 공간에서 표현되는 방식을 탐구해 우수논문상을 받았다. 박사 연구에서는 하이데거의 ‘시적 거주’를 공간디자인의 관점에서 재구성하고, 장소·사물·타인·시간의 요청에 응답하는 ‘상응적 공간’이라는 개념을 제안했다. 최근에는 이러한 연구를 거리 퍼포먼스로 확장해 몸과 행위, 관계와 시간을 공간을 변화시키는 요소로 실험하고 있다. 


그가 던지는 질문은 ‘공간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에서 ‘사람의 행동과 관계가 공간을 어떻게 다른 장소로 변화시키는가’로 옮겨가고 있다. 이 박사는 이를 ‘사건의 생성→관계의 재조직→장소의 전환’이라는 흐름으로 설명한다.


〈도시시작: 움직이는 아뜰리에〉는 건물이나 길을 새로 만들지 않는다. 대신 그곳을 바라보는 시선과 걷는 방식, 몸의 움직임을 바꾼다. 이경미 박사는 평창동의 계단과 골목, 경사와 자연을 하나의 거대한 아뜰리에로 삼아 ‘사람이 달라지면 같은 공간도 다른 장소가 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예술의 방식으로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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