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로와 농업, 절기의 지혜에서 기후적응의 지혜로
- 한로가 지나면 가을이라는데… 달라진 계절, 달라진 농업
24절기 가운데 열일곱 번째인 한로(寒露)가 다가왔다. 한로는 말 그대로 ‘찬 이슬이 맺히기 시작한다’는 뜻이다. 양력으로 10월 8일 무렵, 태양이 황경 195도에 이르는 때다. 기상청은 한로를 찬 공기와 만나 이슬이 서리로 변하기 직전의 시기로 설명한다. 예부터 우리 조상들은 이 시기를 단순한 날짜가 아니라 자연의 변화를 읽는 중요한 농업의 기준으로 삼았다.
“한로가 지나면 제비도 강남으로 간다”는 속담은 대표적이다. 봄에 찾아왔던 제비가 떠나고 기러기 같은 겨울 철새가 찾아오는 시기라는 뜻이다. 낮의 길이는 짧아지고 아침저녁의 찬 기운은 더욱 뚜렷해진다. 국립민속박물관도 한로를 추수의 계절이 절정에 이르는 시기로 소개하면서, 예부터 농부들이 서리가 내리기 전에 수확을 마치기 위해 분주했다고 설명한다.
그런데 오늘날의 한로는 과거와 조금 다른 질문을 우리에게 던진다. “절기가 바뀌었으니 날씨도 당연히 바뀌는가?” 기후변화 시대에는 그렇다고 단정하기 어렵다.
한로, 여름과 겨울 사이의 기후 경계선
한로를 전후하면 일반적으로 여름의 더위가 물러가고 가을의 선선함이 본격화된다. 비가 온 뒤에도 늦더위가 이어지던 초가을과 달리, 한로 이후에는 차가운 공기가 유입되면서 기온이 떨어지는 날이 점차 많아진다. 특히 맑은 날 밤에는 지표면이 빠르게 냉각되면서 일교차가 커지고, 농작물에는 서리와 저온의 위험도 커진다.
하지만 기후변화는 이러한 계절의 경계를 흐리고 있다. 기상청의 과거 분석에서도 가을철 절기의 평균기온과 최고·최저기온은 장기적으로 상승하는 경향을 보였으며, 특히 최저기온의 상승폭이 상대적으로 크게 나타났다.
따라서 “한로가 되면 무조건 추워진다”라고 하기보다는 한로를 전후해 기온이 낮아지는 계절적 경향이 본격화된다고 보는 것이 과학적으로 적절하다. 실제로 최근에는 10월에도 평년보다 높은 기온이 나타나는 경우가 적지 않고, 반대로 갑작스러운 찬 공기가 내려와 농작물에 저온 피해를 주기도 한다.
한로는 그래서 우리에게 과거의 계절감각을 기억하게 하는 동시에, 변화한 기후를 관찰해야 하는 새로운 기준점이 되고 있다.
한로는 농부에게 ‘수확과 월동 준비’의 신호
전통 농업에서 한로는 매우 바쁜 시기였다. 벼를 비롯한 가을 곡식을 거두고, 콩과 같은 밭작물을 수확하며, 마늘과 보리 등을 파종하고, 겨울을 준비해야 했다. 우리 역사 기록에서도 한로 무렵의 농작업으로 콩 수확, 겨자와 보리 파종, 마늘 심기, 밤과 배 저장 등이 기록되어 있다.
오늘날 농촌에서도 한로 전후는 수확의 중요한 시기다. 벼 수확이 본격화되고 과수원에서는 사과·배·감 등의 수확과 저장 관리가 이어진다. 밭에서는 김장채소와 월동작물의 생육을 관리하고, 시설하우스에서는 밤 기온 하강에 대비해 보온시설을 점검한다.
문제는 기후변화가 농작업의 ‘달력’을 바꾸고 있다는 것이다. 따뜻해진 가을은 작물의 성숙을 늦추거나 앞당길 수 있고, 갑작스러운 고온은 수확 적기를 변화시킬 수 있다. 반대로 갑작스러운 한파나 서리는 수확 직전 농산물에 큰 피해를 줄 수 있다.
이제 농부에게 중요한 것은 단순히 “한로가 언제인가”가 아니다. 한로 전후의 기온, 강수, 일교차, 서리 가능성, 토양수분을 어떻게 읽느냐가 중요하다. 기상정보가 농업 생산의 새로운 자원이 되는 이유다. 실제로 기상청은 주산지 기상정보, 농작물 생산성 예측, 서리 예측 등 농업과 기상정보를 결합한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한로가 던지는 ESG의 메시지
한로는 ESG의 관점에서도 의미가 크다. ESG를 기업의 환경보고서나 탄소배출량 관리에만 한정해서는 안 된다. 기후변화로부터 농업과 농촌의 생산 기반을 지키는 것 역시 중요한 환경(Environment)과 사회(Social)의 문제다.
농업은 기후에 가장 민감한 산업 가운데 하나다. 폭염과 가뭄, 집중호우뿐만 아니라 한로 이후 찾아오는 저온과 서리도 농산물의 생산량과 품질을 좌우한다. 따라서 농업의 ESG는 탄소를 얼마나 줄였는가뿐만 아니라 변화하는 기후에 얼마나 잘 적응하고 농업의 지속가능성을 확보했는가까지 포함해야 한다.
특히 앞으로의 농업은 ‘절기 농업’에서 ‘데이터 기반 기후적응 농업’으로 한 단계 더 발전해야 한다. 위성·드론·자동기상관측장비와 인공지능을 활용해 작물의 생육상태와 기상위험을 실시간으로 파악하고, 수확과 방제·관수·보온 시기를 과학적으로 결정해야 한다. 기상청이 농림수산 분야에서 주산지 기상정보와 생산성·서리 예측 서비스를 확대하는 것도 이러한 변화의 한 사례다.
한로는 자연이 우리에게 보내는 하나의 신호다. “이제 계절이 바뀌고 있으니 준비하라”는 신호다. 옛 농부들은 찬 이슬과 철새의 이동, 아침저녁의 기온을 보며 수확과 파종의 때를 결정했다. 오늘날 우리는 여기에 기상관측과 기후데이터라는 새로운 도구를 더할 수 있다.
기후가 변했다고 해서 절기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절기의 의미는 더욱 중요해졌다. 다만 이제 우리는 절기를 과거의 농사 달력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변화하는 기후를 관찰하고 농업의 미래를 준비하는 ‘기후경보의 시계’로 활용해야 한다.
찬 이슬이 맺히는 한로. 농부에게는 수확을 서둘러야 할 때이고, 겨울을 준비해야 할 때다. 동시에 우리 사회에는 기후위기에 더욱 정교하게 적응해야 할 때가 왔다는 메시지를 보내고 있다. 한로의 지혜를 오늘의 데이터와 결합하는 것, 그것이 기후위기 시대 농업 ESG의 출발점이다.
덧붙이는 글 ㅣ 남재철 (서울대학교 특임교수, 前 기상청장)
기상청장을 역임하며 국가 기후 관측과 재해 대응 정책을 총괄했다. 국립기상과학원장, 수도권기상청장, 기상청 차장 등을 거치며 기상·기후 분야 전반에서 정책과 연구를 수행해 왔다. 세계기상기구(WMO) 집행이사 및 대기과학위원회 부의장을 맡아 국제 기후 협력에도 참여했다.
마르쿠스 Who’s Who 과학기술인명사전에 등재된 바 있으며, 홍조근정훈장을 수훈했다. 『6번째 대멸종 시그널, 식량 전쟁』의 저자이며, 현재 기후변화 대응, 기상재해, 식량안보 분야에서 연구와 자문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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