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애리 주연 심리극… 상실과 고립, 존재의 의미를 탐색
무대 위에 선 정애리가 관객 앞에 전혀 다른 얼굴로 돌아왔다. 따뜻한 어머니의 이미지로 오랫동안 사랑받아온 배우 정애리가 연극 《더 마더(The Mother)》를 통해 상실과 집착, 불안으로 무너져가는 여성의 내면을 그려내며 새로운 연기 변신의 시작을 알렸다.
연극 《더 마더》는 지난 29일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에서 막을 올렸다. 작품은 영화 《더 파더(The Father)》로 제93회 아카데미 각색상을 수상한 프랑스 극작가 플로리앙 젤레르(Florian Zeller)의 ‘가족 3부작’ 중 첫 번째 작품으로, 가족이라는 가장 익숙한 관계 속에서 벌어지는 상실과 고립, 기억의 왜곡을 심리 스릴러 형식으로 풀어낸다.
정애리는 이번 작품에서 평생 가족을 중심으로 살아온 여성 ‘안느(Anne)’ 역을 맡았다. 아들의 독립과 남편의 변화 속에서 점차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잃어가는 인물이다. 작품은 반복되는 상황과 어긋나는 대사, 뒤틀린 기억을 통해 안느의 불안정한 심리를 따라가며 관객을 그의 내면 깊숙한 곳으로 끌어들인다.
특히 정애리는 이번 무대를 두고 “48년 연기 인생 중 가장 파격적인 엄마 역할”이라고 밝히며 기존의 ‘국민 어머니’ 이미지를 벗어난 새로운 도전에 나섰다. 오랜 시간 따뜻하고 헌신적인 어머니 역할로 대중과 만나왔던 그가 불안과 결핍, 집착과 광기를 드러내는 인물을 선택했다는 점에서 공연계의 관심도 높아졌다.
연출을 맡은 이강선은 관객이 안느의 거실이 아닌 ‘안느의 머릿속’에 들어온 듯한 경험을 하도록 무대를 구성했다고 설명했다. 현실과 망상이 교차하는 비선형 구조를 통해 관객은 자신이 보고 있는 장면이 실제인지 환상인지 끊임없이 의심하게 된다. 작품 속 강렬한 붉은 드레스 역시 안느의 불안과 욕망, 그리고 사라져가는 존재를 붙잡으려는 마지막 몸부림을 상징하는 주요 장치로 활용된다.
최근 공연계에서는 전통적인 모성 서사에서 벗어나 어머니를 하나의 독립된 인간으로 바라보는 작품들이 주목받고 있다. 《더 마더》 역시 헌신과 희생의 상징으로 소비돼온 모성을 넘어 상처와 결핍, 외로움을 지닌 인간의 모습을 전면에 내세우며 관객에게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정애리를 비롯해 김승욱, 서진원, 가은이 함께 출연하는 《더 마더》는 모성에 대한 익숙한 시선을 넘어 한 인간의 불안과 결핍, 그리고 존재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하는 작품으로 주목받고 있다.
가족을 위해 살아온 한 사람이 자녀의 독립과 관계의 변화 속에서 자신의 존재 이유를 다시 찾아가는 과정은 오늘날 많은 중장년 세대가 마주하는 현실과도 맞닿아 있다. 작품은 가족 안에서 보이지 않았던 외로움과 상실감을 섬세하게 드러내며, 관계와 돌봄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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