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보다 오래 남는 것은 폐허가 아니라 평화다
20세기 세계는 미국과 소련이라는 두 초강대국이 대립했던 냉전의 시대였다. 양국은 핵무기를 앞세워 서로를 견제했지만, 역설적으로 직접적인 전면전은 피했다. '상호확증파괴(MAD)'라는 공포가 오히려 평화를 유지하는 장치가 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세계는 두 초강대국이 지배하는 질서 속에서 움직였고, 어느 누구도 이들의 군사력에 맞설 수 없었다.
그러나 21세기의 국제질서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와 장기전을 이어가고 있으며, 미국 역시 이란과의 군사적 충돌 속에서 중동의 긴장을 관리해야 하는 상황에 놓여 있다. 세계 최강의 군사력을 가진 국가들이 상대적으로 국력이 작은 국가 또는 지역 세력과 충돌하고 있지만, 누구도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
이것은 현대전이 가진 가장 중요한 진실을 보여준다.
군사력은 전쟁을 시작할 수는 있지만, 평화를 만들지는 못한다.
과거에는 거대한 군대가 국경을 넘어 수도를 점령하면 전쟁이 끝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현대전은 다르다. 드론과 정밀유도무기, 사이버전, 정보전, 국제사회의 경제제재, 여론전이 복합적으로 작동하면서 전쟁은 단순한 군사적 충돌을 넘어 국가 전체의 소모전으로 변했다.
세계 최강의 군사력을 보유한 국가라 하더라도 상대 국가의 국민 의지와 국제사회의 정치적 압력까지 무너뜨리기는 쉽지 않다.
이러한 모습은 역사를 돌아보면 결코 새로운 일이 아니다.
기원전 3세기, 로마는 지중해의 패권을 놓고 카르타고와 세 차례의 포에니 전쟁을 치렀다. 결국 승리는 로마의 것이었지만, 그 과정에서 막대한 인명과 국력이 소모되었다. 승리한 로마조차 전쟁의 상처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또한 기원전 31년 악티움 해전 이후 로마는 이집트를 정복하며 지중해 세계의 절대 강자로 떠올랐다. 그러나 이집트를 무너뜨렸다고 해서 갈등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이후에도 제국은 끊임없이 국경 방어와 반란 진압에 막대한 비용을 지출해야 했다. 영토는 넓어졌지만 평화는 멀어졌다.
더 오래 거슬러 올라가면 페르시아 제국은 세계 최강의 군사력을 자랑했지만 작은 그리스 도시국가들의 저항을 완전히 꺾지 못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 역시 거대한 제국을 건설했지만, 그의 사후 제국은 빠르게 분열되었다.
근대에도 같은 역사는 반복된다.
나폴레옹은 유럽 대부분을 정복했지만 러시아 원정에서 무너졌고, 히틀러 역시 압도적인 군사력으로 유럽을 제패했지만 결국 독일은 폐허 속에서 전쟁을 마감했다. 미국은 베트남과 아프가니스탄에서, 소련은 아프가니스탄에서 압도적인 군사력을 보유하고도 원하는 정치적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다.
역사는 하나의 공통된 결론을 말하고 있다.
강한 군대가 반드시 강한 평화를 만드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전쟁이 길어질수록 승자와 패자의 경계는 희미해진다. 경제는 무너지고, 젊은 세대는 희생되며, 난민은 국경을 넘어 세계 곳곳으로 흩어진다. 식량과 에너지 가격은 급등하고 국제 공급망은 흔들린다. 오늘날의 전쟁은 전장에 있는 군인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전 세계 시민들의 일상까지 위협한다.
특히 핵무기와 인공지능, 자율무기체계가 등장한 오늘날의 전쟁은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위험하다. 한 번의 오판이 인류 전체의 재앙으로 이어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래서 오늘날 국제사회가 추구해야 할 힘은 군사력이 아니라 외교력이며, 무기가 아니라 신뢰이고, 승리가 아니라 공존이어야 한다.
평화는 결코 나약함이 아니다. 오히려 가장 큰 용기와 가장 높은 수준의 정치적 지혜가 요구되는 선택이다.
로마가 남긴 것은 전쟁만이 아니었다. 법과 도로, 행정체계와 문명이라는 유산도 함께 남겼다. 인류가 오늘 기억하는 것은 수많은 전투의 이름보다 그들이 남긴 문명의 가치이다.
오늘의 미국과 러시아, 그리고 세계의 모든 강대국 역시 역사의 같은 시험대 위에 서 있다.
과연 미래 세대는 이 시대를 '전쟁으로 국력을 소모한 시대'로 기억할 것인가, 아니면 '대화를 통해 새로운 국제질서를 만든 시대'로 기억할 것인가.
역사는 반복되지만, 교훈은 반복되어서는 안 된다.
강대국이 진정으로 위대한 이유는 더 많은 나라를 무너뜨리는 능력이 아니라, 더 많은 생명을 지켜내는 책임에 있다.
인류는 이미 수천 년 동안 전쟁의 참혹함을 충분히 경험했다. 이제는 누가 더 강한가를 증명하는 시대가 아니라, 누가 더 오래 평화를 지켜낼 수 있는가를 경쟁해야 할 시대다.
칼은 적을 굴복시킬 수는 있어도 마음을 얻지는 못한다. 그리고 마음을 얻지 못한 승리는 결국 또 다른 전쟁의 시작일 뿐이다.
BEST 뉴스
-
[윤재은 칼럼] ‘한 채라도 더’보다 먼저 물어야 한다…그 집은 누가 살 수 있는가
▲ 윤재은 국민대 명예교수가 인천 운서동에 설계한 2층 목조 주택으로 총 공사금액 2억원에 건축주가 직접공사해 완공한 60평의 주택이다. 약 30평의 1층은 부모세대가 살고, 약 30평의 2층은 아들 세대가 사는 주택으로 2~3억대로 청년, 신혼부부, 서민들이 거주가능한 한국형 주거 모델... -
[서정태의 ESG 현장 클리닉①] ISO 53001 지속가능발전목표경영시스템 국제표준 공개에 왜 관심이 높을까?
▲ 기사의 이해를 돕기 위한 이미지 [사진=Ai] 글로벌 공급망 재편과 함께 유럽연합의 공급망 실사지침(CSDDD), 탄소국경조정제도(CBAM), 글로벌 원청사의 에코바디스(EcoVadis), 이크래더블 SH평가, RBA 평가 요구가 국내 산업 현장을 강타하고 있다. 특히 대기업에 납품하는 중... -
[남재철의 기후&식량안보⑫]엘니뇨가 흔드는 밥상, ESG와 식량안보에서 답을 찾다
▲ [남재철의 기후&식량안보] 엘니뇨가 흔드는 밥상, ESG와 식량안보에서 답을 찿다 [사진=Ai, 남재철] 우리는 경제를 이야기할 때 금리와 환율, 유가와 주가를 먼저 떠올린다. 그러나 이제는 기후도 빼놓을 수 없는 경제 변수가 됐다. 적도 태평양에서... -
[서정태의 ESG 현장 클리닉②] 중소기업, 위험성 평가를 비용이 아닌 경쟁력 강화로 인식해야 한다.
▲서정태의 ESG현장클리닉, 기사의 이해를 돕기 위한 이미지 [사진=서정태, Ai] 최근 중소기업 경영자들의 "위험성 평가 인정서"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그 배경에는 중대재해 처벌 등에 관한 법률 시행에 따른 안전보건 관리 책임 강화와 산업안전보건법상 근로자 5인 이... -
[남재철의 기후&식량안보⑩] 기후가 휘두른 채찍, 복합재난에 대응해야 한다
▲ [남재철의 기후&식량안보] 기후가 휘두른 채찍, 복합재난에 대응해야 한다 [사진=남재철, Ai] 올여름 지구촌 곳곳에서 기후위기의 새로운 얼굴이 나타나고 있다. 유럽에서는 기록적인 폭염과 가뭄이 이어지면서 산불이 확산되고 있다. 그런데 한 지역에서 ... -
[남재철의 기후&식량안보⑪] 폭염의 시대, 가장 낮은 곳에 시원한 희망을 전하다
▲ 서울연탄은행 사회공헌 위원회 ‘더 낮은 곳으로, 코리아 커뮤니티’ 봉사자 [사진=서울연탄은행 제공] 올여름도 기록적인 폭염이 이어지고 있다. 폭염은 단순히 불쾌한 더위를 넘어 사람의 생명과 건강을 위협하는 재난이 됐다. 특히 냉방시설이 충분하지 않은 ...
전체댓글 0
실시간뉴스
추천뉴스
사람들
more +-
오바마 “책은 세상을 보는 방식을 바꾼다”…인생 바꾼 6권 다시 읽는다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이 자신에게 깊은 영향을 준 책들을 다시... -
UN 인권사무소, 말리 원주민 지도자 우무 디코 조명… “기후 정의와 원주민 권리 향상에 앞장”
유엔 인권사무소(UN Human Rights)가 7일 저녁 공식 X 계정을 통해 ... -
방사능 연구에 바친 삶… 과학계의 거장 ‘마리 퀴리’를 기리며
과학 계정 ‘월드 오브 사이언스(World of Science)’가 7일 공식 X를 ... -
스크린 넘어 세계를 보살피는 연기파 배우, ‘UN 평화대사’ 샤를리즈 테론(Charlize Theron)의 삶과 헌신
할리우드를 대표하는 연기파 배우이자 인도주의 운동가인 샤를리즈 ...
오피니언
more +-
[남재철의 기후&식량안보⑮] 수소에너지로 여는 지속가능한 미래, 초록에너지의 도전
기후위기가 현실이 되면서 에너지 전환은 더 이상 선택이 아니라 우... -
[용석광의 컴플라이언스와 ESG] ㉖ CP 도입의 5대 핵심 가치: 왜 지금 컴플라이언스 엔진을 켜야 하는가
수많은 기업을 방문해 자율준수 프로그램(CP)과 ISO 인증의 ... -
[서정태의 ESG 현장 클리닉②] 중소기업, 위험성 평가를 비용이 아닌 경쟁력 강화로 인식해야 한다.
최근 중소기업 경영자들의 "위험성 평가 인정서"에 대한 관심이 높아... -
[남재철의 기후&식량안보⑭] 달콤한 초콜릿을 넘어 ESG 가치를 말하다
달콤한 초콜릿 한 조각에 이렇게 깊은 역사와 이야기가 담겨 있을...
기획 / 탐방
more +-
[ESG탐방] 농업 생산지가 관광 자원으로… 홋카이도 ‘패치워크 로드’와 ‘팜 토미타’가 보여준 농촌 경관의 가치
일본 홋카이도 비에이의 ‘패치워크 로드’와 나카후라노... -
[ESG탐방] 화산 지질이 만든 지하수의 흐름… 비에이 ‘시로가네 폭포’가 보여준 자연자산의 가치
일본 홋카이도 비에이정의 시로가네 온천 지역에는 화산 지질과 지... -
[ESG탐방] 방재시설에서 관광자원으로... 자연과 함께 만들어진 홋카이도 비에이 ‘청의 호수’
일본 홋카이도 비에이정에 위치한 청의 호수(아오이이케·青い... -
[ESG탐방] 아사히카와 디자인센터, 지역 산업을 지속가능한 자산으로 연결
일본 홋카이도 아사히카와시는 가구와 목공산업이 발달한 도시다. 홋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