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행정부가 유럽을 상대로 본격적인 문화 전쟁을 벌이고 있다는 분석이 나왔다. 유럽 외교관계위원회(ECFR)와 유럽문화재단이 발표한 공동 보고서는 미국 대통령이 유럽 내 우익 세력과 결집해 유럽 정치의 이념적 중심을 보수적 가치로 옮기려 하고 있으며 동시에 유럽 연합(EU)의 정체성과 자율성을 흔드는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트럼프는 헝가리의 오르반, 이탈리아의 멜로니, 슬로바키아의 피코 등 우익 지도자들과 동맹을 강화하는 한편 폴란드 민족주의 성향의 카롤 나브로츠키를 백악관에 초청해 지지를 보이는 등 특정 국가의 정치에 적극 개입해 왔다. 특히 언론 자유 문제를 쟁점화하며 이를 유럽 내 마가(MAGA) 성향 정당의 구호로 활용하려는 움직임이 두드러진다는 평가다.
보고서는 또 트럼프가 무역 협상에서 브뤼셀 기관을 압박하고 우크라이나 전쟁 논의에서 EU 지도자들을 배제하며, 관세 위협과 안보 부담을 카드로 삼는 등 제도적 압박도 병행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ECFR의 파웰 제르카는 “트럼프의 문화 전쟁에서 유럽 전체가 표적”이라며, 이는 단순한 외교 갈등을 넘어 유럽의 존엄성과 글로벌 행위자로서의 자율성을 겨냥한 투쟁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보고서는 유럽 시민 여론이 여전히 강력한 친EU 성향을 보이고 있다고 진단했다. 유로바로미터 조사 결과 EU에 대한 신뢰는 2007년 이후 최고치를 기록했으며 스웨덴·프랑스·덴마크·포르투갈 등지에서 뚜렷한 상승세가 나타났다. 또한 유럽 방위비 지출 확대와 미국으로부터의 군사적 자율성 확보에 대한 지지도 점차 커지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문제는 유럽 지도자들의 대응 태도다. 보고서는 일부 지도자들이 아첨과 회유 그리고 주의를 돌리는 방식으로 트럼프와 마찰을 최소화하려 한 결과가 오히려 그의 문화 전쟁을 키우는 빌미를 제공했다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전문가들은 EU가 방어적 태도를 넘어 능동적으로 의제를 설정하고 디지털 서비스법과 무역 규제 같은 제도적 수단을 적극 활용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보고서는 유럽의 상황을 영화 트루먼 쇼에 빗대며 외부가 짜놓은 무대 위에서 살아가는 주인공처럼 유럽이 지금 “자신만의 현실을 창조할 것인지, 아니면 주어진 무대 안에 머물 것인지”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고 경고했다. 나아가 유럽의 정체성과 공동 가치를 지키기 위해 “유럽 자체의 대본을 써 내려가야 한다”고 촉구했다.
결국 트럼프 행정부가 촉발한 문화 전쟁은 유럽에 위기이자 기회가 되고 있다. EU가 이 도전에 대응해 독자적 의제와 자율성을 강화한다면 불안정한 국제 질서 속에서도 번영할 수 있다는 메시지가 이번 보고서의 핵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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