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연구는 약 4만 년 전 구석기 시대 인류가 이미 체계적인 기호 체계를 사용했을 가능성을 제시한 논문으로, 독일 자를란트대학교의 크리스티안 벤츠(Christian Bentz)와 베를린 선사시대 및 초기사 박물관의 에바 두트키에비치(Ewa Dutkiewicz)가 공동으로 수행했다. 논문 제목은 「4만 년 전 인류는 관습적 기호 체계를 발전시켰다(Humans 40,000 y ago developed a system of conventional signs)」이며, 미국 국립과학원회보인 『미국국립과학원회보(Proceedings of the National Academy of Sciences, PNAS)』에 2026년 게재됐다. 해당 연구는 123권 9호에 수록됐으며 디지털 객체 식별자(DOI)는 10.1073/pnas.2520385123이다.
연구진은 독일 슈바벤 알프스(Swabian Jura) 지역에서 출토된 구석기 시대 상아·뼈·뿔 유물 260점을 대상으로 약 3,000개의 기하학적 기호를 분석했다. 컴퓨터 기반 정보 이론 분석(Information-theoretic analysis)을 통해 기호의 반복성, 조합 구조, 정보 밀도를 측정한 결과, 이 표식들이 단순 장식이 아니라 일정한 규칙을 가진 상징 체계일 가능성이 높다는 결론을 제시했다.
특히 제한된 기호를 조합해 정보를 압축하는 방식이 메소포타미아의 원시 쐐기 문자(원시 쐐기 문자, protocuneiform)와 유사한 수준의 구조적 복잡성을 보였다는 점이 핵심 성과로 평가된다. 연구진은 이를 문자 그 자체로 단정하지는 않았지만, 인간이 정보를 외부 기호로 부호화하는 능력(코딩, coding)이 문자 발생 훨씬 이전부터 존재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로 해석했다.
이 논문은 문자 기원을 약 5천 년 전으로 보던 기존 인식을 넘어, 상징적 정보 기록 능력이 최소 4만 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음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인지 진화(cognitive evolution)와 문명 형성 연구에 중요한 전환점을 제공하고 있다.
기호는 무작위가 아니었다
표식의 분포는 특정한 규칙을 보였다. 동물 조각상과 도구에는 십자형 기호가 반복적으로 나타났지만 인간 형상에는 거의 발견되지 않았다. 이는 상징 사용에 사회적 관습이나 금기가 존재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또한 일부 기호는 일정한 반복 패턴을 보여 수량, 시간, 사건 순서를 나타냈을 가능성이 제기됐다.
이 연구와 별도로 진행된 영국 더럼대학교 연구에서는 유사 시기의 Y자형 기호가 동물의 출산 시기, X자형 기호가 짝짓기 시기와 통계적으로 연관된다는 분석이 제시된 바 있다. 이는 사냥 채집 사회에서 계절 정보와 생태 지식을 기록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문자 이전의 문자
문자의 정의는 음성 언어를 시각 기호로 완전히 대응시키는 체계를 의미한다. 현재까지 확인된 가장 이른 문자 체계는 메소포타미아의 쐐기 문자와 이집트 상형문자로 약 5천 년 전으로 본다. 그러나 이번 연구는 문자 이전 단계에서도 이미 추상 기호를 이용해 정보를 저장하고 공유하는 인지 능력이 존재했음을 보여준다.
구석기 인류는 이미 정교한 조각, 개인 장신구, 악기 제작, 장거리 원재료 교환 등 복합적 문화 행동을 보였다. 여기에 체계적 기호 사용이 추가된다면 상징적 사고와 정보 관리 능력이 현생 인류 초기부터 확립돼 있었음을 의미한다.
의미는 아직 해독되지 않았다
다만 연구진은 개별 기호의 구체적 의미를 특정하기는 어렵다고 밝혔다. 동일한 기호라도 시간과 맥락에 따라 다른 의미를 가졌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또한 이번 분석은 상징의 구조적 복잡성과 반복성을 보여주는 수준이며 언어와 직접적으로 연결된 문자 체계로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중요한 점은 인류가 정보를 외부 매체에 코드화하는 능력을 최소 4만 년 전부터 활용했을 가능성이 확인됐다는 것이다. 이는 문자를 문명 이후의 산물로 보는 기존 관점을 수정하게 만든다.
인지의 진화가 먼저였다
문자는 기술이 아니라 인지 능력의 산물이다. 이번 연구는 언어를 기록하는 체계가 등장하기 훨씬 이전에 인간이 환경 정보와 사회적 지식을 기호로 저장하려는 시도를 했음을 보여준다. 즉 ‘문자’라는 제도는 늦게 등장했지만 정보를 기호화하는 정신적 능력은 훨씬 오래전에 형성됐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동굴 벽화와 조각상에 새겨진 반복 기호는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기억 보조 장치, 생태 달력, 집단 규범 표시 등 다양한 기능을 가졌을 수 있다. 이는 문자 발생을 하나의 혁명적 사건이 아니라 수만 년에 걸친 점진적 인지 진화의 결과로 이해해야 함을 시사한다.
문명의 기준을 다시 묻다
이번 연구는 ‘문자 보유 여부’를 문명 판단의 기준으로 삼아 온 전통적 관점을 재검토하게 만든다. 문자 체계가 없었던 사회 역시 복잡한 상징 체계와 정보 관리 능력을 갖고 있었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문자는 인간이 갑자기 만들어낸 발명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던 상징적 사고 위에 구축된 기술일 수 있다. 4만 년 전 유물에 남은 작은 기호들은 인류가 언제부터 ‘생각을 기록’하기 시작했는지에 대한 질문을 다시 던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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