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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재의 세계오지 도보순례 ⑫] 페르시아 제국의 기원2, ‘아케메네스 왕조’를 개국한 키루스 대왕

  • 윤재훈
  • 입력 2025.08.22 07: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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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르시아 제국의 창건자 키루스 대왕은 기원전 6세기 메디아·리디아·바빌로니아를 정복하며 아케메네스 제국의 기틀을 다졌고, 종교의 자유와 피정복민 존중, 유대인 해방과 예루살렘 성 재건 지원 등 포용적 통치로 ‘민족의 아버지’라 불리며 칭송받았다. 그의 무덤인 파사르가대는 지금 황야에 쓸쓸히 남아 있으나, 위대한 정복자이자 자비로운 군주였던 그의 이름은 여전히 이란과 세계인의 기억 속에 살아 있다.

 페르시아 제국의 기원2, ‘아케메네스 왕조’를 연 키루스 대왕

 

"페르시아인들이 말하기를 다리우스는 상인이고 캄비세스는 장인인 반면,

키루스는 아버지라고 한다.

다리우스는 늘 어떤 결과나 이익을 중시 여겼고,

캄비세스는 거칠고 가혹했지만

키루스는 자상하게 배려해 주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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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활한 벌판 위에 대제국의 흔적은 거의 사라지고 없다. [사진=윤재훈]

 

<파사르가대>를 가다.


해발 1,900미터에 있는 넓은 벌판, 석양이 밀려오는 황야는 삭막하기 그지없다. 인적도 거의 보이지 않는 땅에 머물렀던 229년의 대제국은 흙먼지와 잡풀만 날리지만 어느 것 하나 예사롭지가 않다. 망해버린 고려 오백 년 도읍지를 한 필의 말에 의지해 찾아드는 고려 유신 길재의 야윈 어깨를 보는 듯도 하다.


오백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드니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 데 없어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련가 하노라.

-‘오백년 도읍지를’, 길재


입구에 들어서자 2500여 년 동안 홀로 덩그러니 솟아있는 석묘 하나가 보인다. 주위에는 아무 것도 없이 독야청청(獨也靑靑)이다. 석총(石塚)은 6단의 돌 플랫폼과 여섯 번째 단 위에 박공지붕이 있다. 높이는 11m가 조금 넘는 듯하다. 기단 상층부에 직사각형 모양의 적실이 있는데 길이는 3,17m, 폭은 2,11m, 높이도 2,11m로 길고 좁은 입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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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페르세폴리스의 마지막 중흥을 이끈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 무덤. 그가 이집트 재탈환 후에 환관들의 발호가 더욱 심해졌다. 촬영 [사진=윤재훈]

 

고대 엘람 왕국이 아시리아에 의해 멸망한 후, 기원전 7세기 중반에 페르시아의 아케메네스 왕조가 등장하였다. 이 왕조의 시조는 테이스페스(Teispes)로 그는 엘람의 안잔(Anshan) 지역을 통치하며 독립적인 왕국을 세웠다. 그의 통치 시기는 대략 기원전 635년경으로 추정된다.


테이스페스의 사후 왕국은 두 아들인 키루스 1세(Cyrus I)와 아리아라메스(Ariarames)에게 분할되었다. 키루스 1세는 안잔을 통치하고 아리아라메스는 파르수아(Parsumash) 지역을 통치하였다. 이러한 분할 통치는 후에 키루스 2세(Cyrus II) 즉 키루스 대왕의 통합 노력으로 이어졌다.


기원전 559년에 즉위한 키루스 2세는 메디아 왕국의 아스티아게스(Astyages) 왕의 딸인 만다네(Mandane)와 결혼하여 메디아와의 동맹을 강화하였다. 그는 메디아 왕국을 정복하고 이후 리디아, 바빌로니아 등을 차례로 정복하여 아케메네스 제국의 기틀을 마련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통해 아케메네스 왕조의 형성과 확장은 단순한 군사적 정복뿐만 아니라 전략적 동맹과 정치적 결혼을 통한 외교적 노력의 결과임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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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금 테이블과 잔, 황금 침대 등 온갖 보석으로 장식된 관이 있던 곳 [사진=윤재훈]

 

키루스 대왕은 페르시아인들에게 ‘건국의 아버지’로 널리 알려져 있다. 개신교 성경에서는 <고레스 왕>으로 표기된다. 


무덤 안으로 들어가는 문은 매우 좁아 키가 작은 사람조차 많은 불편을 겪어야 들어갈 수 있을 정도였다. 내부에는 키루스의 시신이 안치된 금관과 금으로 세공된 발받침이 있는 침대가 놓여 있었다. 바닥에는 보라색 양탄자가 깔려 있고 그 위에는 바빌로니아에서 제작한 다양한 튜닉과 메디아 코트가 올려져 있다. 아리스토불루스는 특히 히아신스 색으로 염색한 메디아인의 바지와 겉옷과 여러 가지 색깔의 옷들이 함께 놓여 있었다.


금과 보석으로 장식된 목걸이, 사브르, 귀걸이 등이 놓여 있었으며 침상 한가운데에는 키루스의 관이 자리 잡고 있다. 이어지는 오르막길 근처에는 무덤을 지키는 사람들을 위해 지어진 작은 집이 있다. 이 경비 임무는 키루스의 아들 캄비세스 시대부터 이어져 내려왔다. 경비들에게는 매일 양 한 마리와 정해진 양의 밀가루와 포도주가 바쳐졌다. 한 달에 한 번은 키루스에게 제물로 말을 바쳤다.


무덤 위에는 페르시아 문자로 다음과 같은 비문이 새겨져 있다.


"오, 사람이여, 나는 캄비세스의 아들 키루스이며,

페르시아 제국을 세웠고 아시아의 왕이었다.

그러니 이 기념비를 세우는 것을 아까워하지 마시오."


알렉산더 대왕은 페르시아를 정복하자마자 키루스의 무덤에 들어가고 싶어했지만 관과 침대를 제외한 나머지 물품들은 모두 이미 옮겨진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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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메이삼 케샤바르즈가 재현한 페르세폴리스 [사진=Meysam Keshavarz]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페르시아를 폐허로 만들고 이곳을 방문하여 아리스토불루스에게 무덤 안으로 들어가게 했다. 그 안에는 황금 테이블과 잔, 황금 침대, 관이 있고 온갖 보석으로 장식되어 있었으니, 왕은 그 안에서도 황금에 휩싸여 영원한 영화를 누리고 싶었나 보다.

 

안내문에도 키루스 대왕의 시신은 황금관 안에 있었으며, 그 옆에는 무기와 유품들이 같이 매장되어 있었다. 그리고

 

“나는 아케메네스 키루스 대왕이다.”

 

라는 글자가 석각으로 새겨져 있었다. 고대 그리스 역사가들의 기록에 의하면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그의 무덤으로 믿어 그렇게 전해진다고 한다.

 

특히 페르시아인들의 새해에 열리는 최대의 축제인 ‘노루즈(Nowruz)’ 기간에는 전국에서 수많은 이란인들이 무덤 주변에 모여 축하 행사를 한다. 그들은 키루스 대왕을 이란과 페르시아 제국의 창시자로 존경한다.

 

그러나 지금은 그 흔적조차 아득하니, “인간의 영화가 덧없다”는 대중 가사 한 소절이 저절로 흘러나온다. 백골마저 다 풍화되어 탈골됐을 시간, 수천 년 지축을 누르고 있었을 돌기단, 그의 후손들도 다 떠나가 버린 광활한 벌판 위에 홀로 누워있는 대왕의 자취는 쓸쓸하기만 하다.

  

위대한 정복자, 키루스 대왕(Cyrus the Gre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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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사르가대’ 폐허 뒤로 띄엄띄엄 인가들이 보인다. [사진=윤재훈]

 

대왕은 이곳이 고향으로 이란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왕으로 불리며 이란 국민의 절대적 지지를 받았다. 강력한 군사력으로 리디아, 바빌로니아 등 주변국들을 잇달아 점령했으며, 다양한 왕조의 문화를 존중하면서 통치했다.


바빌로니아를 점령한 후에도 칙령을 내려 끌려온 유대인들을 풀어주었다. 나아가 예루살렘 성이 재건될 수 있도록 재정적 지원도 아끼지 않았다. 그는 종교의 자유를 인정했으며, 자신의 군인들에게 점령지의 주민들을 약탈하거나 위협하는 행동을 금지 시켰다.

 

역사상 키루스 대왕처럼 여러 민족으로부터 칭송을 받은 왕을 찾아보기 어렵다. 그는 유대인들로부터 찬양을 받았을 뿐 아니라 적군이었던 그리스에서도 오랫동안 위대한 군주로 추앙받았다. 그리스 역사가 크세노폰Xenophon은 ‘비길 자가 없는 가장 위대한 세계 정복자’라고 했다. 역사의 아버지로 불리는 그리스의 헤로도토스도 최고의 역사서 <역사>에서


‘페르시아인들이 말하기를 다리우스는 상인이고 캄비세스는 장인인 반면,

키루스는 아버지라고 한다.


다리우스는 늘 어떤 결과나 이익을 중시 여겼고, 캄비세스는 거칠고 가혹했지만

키루스는 자상하게 배려해 주었기 때문이다’

 

고 기록하고 있다. 유대인들조차 그를 ‘하느님의 부름을 받은 자’, ‘하느님의 목자’ 등으로 칭송했다. 그래서 성경에서조차 <고레스 왕>으로 칭송하는지도 모르겠다. 페르시아를 멸망시킨 알렉산더 대왕도 키루스 대왕을 위대하게 여겨 그의 무덤인 <파사르가대>만은 파괴하지 않았다.


진정한 영웅이 머물렀던 자리는 세월 속에서 사라지고 낡아져 갔지만, 현명하고 인자했던 왕의 이름은 지금도 남아 후세인들의 가슴 속에서 두고두고 추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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