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고가 터진 후에야 대책을 마련하는 '사후 약방문' 식의 대응은 오랜 기간 우리 기업과 사회의 고질적인 병폐였다. 하지만 리스크가 발생한 뒤에 치러야 할 법적 처벌과 재무적 손실, 그리고 한순간에 무너지는 평판 리스크는 이제 기업의 생존 자체를 흔드는 수준에 이르렀다. 법을 지키는 수준을 넘어, 기업 스스로 준법 리스크를 사전에 식별하고 예방하는 통제 시스템이 요구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러한 흐름의 중심에 서 있는 것이 바로 공정거래 자율준수 프로그램(CP, Compliance Program)이다.
CP의 개념: 법 준수를 넘어선 자율적 조기 경보 장치
CP는 기업이 공정거래 관련 법규를 준수하기 위해 자체적으로 제정하여 운영하는 교육, 감독 등 내부의 준법경영 시스템이다. 이는 단순히 '어떤 법을 위반하지 말자'는 금지의 목록이 아니다. 임직원 모두에게 공정거래법 준수의 중요성을 인식시키고, 업무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위반 행위를 사전에 감지하고 차단하는 실질적인 '자율적 예방 통제 장치'다.
CP의 진정한 작동 원리는 사전 예방과 사후 재발 방지라는 이중 구조에 있다. 설령 현장에서 예기치 못한 법 위반이 발생하더라도, 조직이 이를 숨기거나 외면하지 않고 신속하게 시정하며 구조적인 개선 조치를 취할 수 있도록 돕는 복원력이 CP의 핵심이다.
대한민국 CP의 도입과 역사적 진화
우리나라의 CP는 미국, 일본 등 선진국의 내부통제 모델과 함께 호주·뉴질랜드의 준법 표준인 AS/NZ 3806을 벤치마킹하여 탄생했다. 공정거래위원회가 주도하여 2001년 7월 「공정거래 자율준수규범」을 제정하고 선포하면서 한국형 CP의 역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도입 초기인 2000년대 초중반의 CP는 종종 기업들이 과징금 감경이라는 행정적 인센티브를 받기 위한 일종의 '방어막'이나 형식적인 제도로 악용된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이에 공정위는 인센티브 기준을 정비하고, 2006년에는 실질적인 운영 수준을 평가하기 위한 CP 등급평가 제도를 전격 도입했다.
이후 CP는 단순한 유행이나 권고 사항에 머물지 않고 끊임없이 고도화되었다. 특히 2024년 6월, 개정된 공정거래법이 본격 시행되면서 CP의 법적 근거가 마련되어 완전한 법제화가 이루어졌다. 이로 인해 CP 우수 기업에 대한 과징금 감경(최대 20%) 등 실질적인 혜택의 법적 토대가 명확해졌으며, 2025년부터는 현행 6등급의 평가 체계가 AAA, AA, A 등 3단계의 'CP 우수기업 지정제'로 개편되어 실행의 내실화를 강하게 요구하고 있다.
ESG 시대, 선택이 아닌 생존의 정체성
지속가능성 지표가 기업 가치를 결정하는 ESG 경영 환경에서 CP의 위상은 더욱 격상되었다. ESG의 사회(S)와 거버넌스(G)는 결국 기업이 누구와 어떻게 투명하게 거래하고, 내부 의사결정의 리스크를 어떻게 제어하는지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글로벌 공급망에서 인권과 공정 거래 실사가 법제화되는 지금, 문서로만 존재하는 CP는 아무런 무기가 되지 못한다. CP를 법무 부서만의 고유 업무가 아니라 구매, 영업, 마케팅 등 전 부서의 일상적인 의사결정 시스템과 유기적으로 결합해야 한다. 준법경영을 기업의 자발적인 '정체성'이자 문화로 삼는 기업만이 다가올 규제의 파도 속에서 시장과 이해관계자들의 굳건한 신뢰를 선점할 수 있을 것이다.
덧붙이는 글 ㅣ 용석광 (Yong Seok Kwang)
세종대학교 경영학과에서 ESG 경영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경영학적 통찰과 실무 전략으로 기업의 지속가능한 성장을 돕는 ESG 및 준법경영 전문가이다. 현재 ESGi 대표이사이자 대학의 겸임교수와 학회 이사로 활동하며 후학 양성과 연구에 매진하고 있다. 또한 다수 기업 및 공공기관의 자문위원으로서 윤리·인권 경영 체계 확립을 이끌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실무 현장의 핵심 지침을 담은 《Compliance 공정거래 CP&ISO 37301 실무가이드》, 《ESG와 윤리·준법경영.ZIP》, 그리고 《ESG 경영의 근간 컴플라이언스 솔루션.ZIP》 등이 있다. 저술 활동과 강연을 통해 기업들이 규범 준수를 넘어 지속가능한 경영 문화를 구축할 수 있도록 실천적인 로드맵을 제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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