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1개 국가·지역서 역대 최다 6만5403점 출품해서 100점 선정
- 런던 자연사박물관 10월 16일 전시 개막
얼음 아래에서 올려다본 구멍 너머로 북극곰 한 마리가 얼굴을 내민다. 남아프리카에서는 붉은부리소등쪼기새가 흰코뿔소의 피부에 부리를 비비고, 미국 캘리포니아의 주택가에서는 야생 흑곰이 수영장에 들어가 더위를 식힌다. 인간이 쉽게 마주하기 어려운 야생의 순간들이 사진에 담겼다.
영국 런던 자연사박물관(Natural History Museum)은 8월 26일(현지시간) 공식 X 계정을 통해 제62회 ‘올해의 야생동물 사진가(Wildlife Photographer of the Year)’ 수상작 가운데 일부를 처음 공개했다. 박물관은 “창의성과 기술을 인정받은 100장의 사진을 통해 자연 세계의 아름다움을 만나게 될 것”이라며 오는 10월 개막하는 전시를 예고했다.
올해 대회에는 121개 국가와 지역의 사진가들이 총 6만5403점을 출품해 역대 최다 기록을 세웠다. 국제 심사위원단은 야생동물 사진과 영화, 과학, 보전 분야 전문가들로 구성됐으며 출품자의 신원을 공개하지 않은 상태에서 작품을 심사했다. 자연사박물관과 해외 보도에 따르면 최종적으로 100점이 선정됐다.
‘올해의 야생동물 사진가’는 1965년 시작된 세계적인 자연·야생동물 사진 공모전이다. 첫 대회에는 361점이 출품됐지만 올해는 6만5000점을 넘어섰다. 단순히 동물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주는 데 그치지 않고 동물의 행동과 서식환경, 인간과 야생동물의 관계, 생물다양성과 자연보전 문제 등을 사진을 통해 전달하는 것이 특징이다.
올해 미리 공개된 작품은 16점이다. 이들 작품은 오는 10월 공개될 100점의 수상작 가운데 각 부문에서 ‘Highly Commended(높이 평가된 작품)’로 선정된 사진들이다.
특히 눈길을 끄는 작품 가운데 하나는 노르웨이 사진가 아우둔 리카르센(Audun Rikardsen)의 ‘Icy Window(얼음 창)’다. 북극해 얼음에 난 숨구멍 아래에서 북극곰을 올려다보는 구도로, 마치 물속에서 숨을 쉬기 위해 올라오는 물범의 시선을 보여준다. 촬영 장소는 노르웨이 스발바르 북쪽의 해빙 지역이다. 리카르센은 물범의 숨구멍 아래에 동작 감지 센서가 장착된 수중 카메라를 설치해 이 장면을 촬영했다.
리카르센은 북극곰이 새벽 4시께 카메라 앞에 나타난 뒤 떠날 때까지 약 8시간을 기다린 것으로 전해졌다. 카메라를 회수하기 전까지 실제 어떤 장면이 촬영됐는지 확인할 수 없었던 촬영 방식이었다.
자연사박물관이 X에 공개한 또 다른 사진은 남아프리카공화국 사진가 어니스트 포터(Ernest Porter)의 ‘Mutual Friends(서로의 친구들)’다. 남아프리카 음푸말랑가의 마니엘레티 야생동물보호구역에서 붉은부리소등쪼기새가 흰코뿔소의 피부에 부리를 비비는 순간을 촬영했다.
소등쪼기새는 코뿔소 등에 붙어 있는 곤충 등을 먹으며 살아간다. 동시에 주변의 위험을 감지하면 울음으로 코뿔소에게 위험을 알리는 역할도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진 한 장이 서로 다른 야생동물 사이의 생태적 관계를 보여주는 셈이다.
미국 사진가 로렌 엘리엇(Loren Elliott)의 ‘Pooltime Pastime’은 인간의 주거지역과 야생동물 서식지가 맞닿고 있는 현실을 포착했다. 미국 캘리포니아주 몬로비아에서 촬영된 이 사진에는 흑곰 한 마리가 주택 수영장에 들어가 있는 모습이 담겼다.
엘리엇은 지역 주민의 집 주방 창문을 통해 정원을 지나가는 흑곰을 촬영하기 위해 여러 시간을 기다렸다. 이 지역에서는 주거 개발이 곰의 서식지까지 확대되면서 야생동물이 주택가에 출현하는 일이 나타나고 있다. 사진은 얼핏 유머러스한 장면처럼 보이지만 도시 확장과 야생동물 서식지의 중첩이라는 문제도 함께 보여준다.
이 밖에도 공개 작품에는 나미비아 나미브사막에서 갑작스러운 모래폭풍을 견디는 나마쿠아카멜레온을 촬영한 드발트 트롬프(Dewald Tromp)의 ‘Eye of the Storm’, 보츠와나에서 다람쥐를 쫓아 나무에 오른 어린 표범의 모습을 담은 알레그라 허튼(Allegra Hutton)의 ‘Up a Tree without a Squirrel’, 아프리카황소개구리가 나비를 잡으려다 놓치는 순간을 포착한 옌스 쿨만(Jens Cullmann)의 ‘Split-Second Escape’ 등이 포함됐다.
노르웨이의 베가르드 비르켈란 아센(Vegard Byrkjeland Aasen)은 차가운 피오르에서 성체 범고래가 새끼의 몸을 수면 위로 떠받치고 있는 장면을 ‘Lifted to the Surface’에 담았다. 미국의 랠프 페이스(Ralph Pace)는 캘리포니아 몬터레이만의 잘피 군락을 지나가는 군소(sea hare)를 촬영한 ‘Ocean Protector’를 출품했다.
자연사박물관은 이번 사진들을 단순한 야생동물 기록을 넘어 자연이 처한 현실을 보여주는 자료로 설명하고 있다. 전시 역시 사진의 예술성과 함께 지구 생물다양성이 직면한 환경적 문제를 조명하도록 구성된다. 박물관은 전시에서 지역의 자연 생물다양성이 얼마나 온전하게 남아 있는지를 나타내는 ‘생물다양성 온전성 지수(Biodiversity Intactness Index)’도 소개할 예정이다.
더그 거(Doug Gurr) 런던 자연사박물관 관장은 자연이 어느 때보다 큰 압력을 받고 있는 상황에서 이번 사진들이 “무엇이 위기에 놓여 있으며 무엇을 보호할 가치가 있는지”를 상기시킨다고 밝혔다.
심사위원장을 맡은 캐시 모란(Kathy Moran)은 올해 공개 작품들이 역대 최다인 6만5403점 가운데 선정됐다며, 이번 사전 공개가 10월 전시에서 만나게 될 100점의 작품을 미리 보여주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번 사진들은 온라인에서도 관심을 모았다. 자연사박물관이 X에 “어떤 사진이 가장 마음에 드는가”라고 묻자 이용자들은 사진에 담긴 생태적 관계와 촬영 순간에 주목했다.
X 이용자 ‘Idris Bello’는 “야생동물 사진 한 장이 교사의 역할을 할 수 있다”며 “숨겨진 하나의 관계를 눈에 보이게 만든다”고 평가했다. 이어 학생들에게 이런 사진을 보여준다면 동물의 행동과 서식지, 인간의 영향 가운데 무엇이 첫 번째 질문을 이끌어낼지 궁금하다고 적었다.
‘The Time Scrolls’는 1965년 361점으로 시작한 대회가 이제 100여 개 국가와 지역에서 수만 점이 출품되는 규모로 성장했다는 점에 놀라움을 표시하면서, 특히 얼음 구멍 아래에서 촬영한 북극곰 사진이 강한 인상을 남겼다는 반응을 보였다.
또 다른 이용자 ‘Evolve’는 북극곰 사진을 두고 “잘못된 출구(Wrong Exit)”라는 제목이 어울리겠다는 재치 있는 댓글을 남겼다.
제62회 ‘올해의 야생동물 사진가’ 부문별 우승자와 올해의 야생동물 사진가 대상(Grand Title), 청소년 대상은 오는 10월 13일 런던 자연사박물관에서 열리는 시상식에서 발표된다. 행사는 야생동물 방송인 크리스 패컴(Chris Packham)과 메건 매커빈(Megan McCubbin)이 진행하며 자연사박물관 유튜브 채널을 통해 생중계될 예정이다.
100점의 수상작을 선보이는 전시는 10월 16일부터 2027년 7월 11일까지 런던 자연사박물관 사우스켄싱턴에서 열린다. 성인 비성수기 입장권은 17파운드부터다. 이후 작품들은 영국과 해외 순회전시를 이어갈 예정이다.
자연사박물관은 이번 전시에 대해 극지에서 열대우림, 바다와 사막에 이르기까지 세계 곳곳에서 포착된 100장의 사진을 통해 자연의 이야기뿐 아니라 지구가 직면한 환경적 도전과 관심이 필요한 생물종·서식지를 함께 보여줄 것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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