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근 모스크바에서 열린 신생 국제 가요 경연대회 ‘인터비전(Intervision)’은 단순한 음악 경연을 넘어 정치적 메시지가 깔린 무대였다. 러시아는 2022년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유럽방송연합(EBU) 주관 유로비전에서 참가 자격을 상실하자 이를 대체할 플랫폼으로 인터비전을 부활시켰다. 이번 대회는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특별 대통령령에 따라 공식 출범했으며 국영 방송과 정부 기관이 총력 지원한 프로젝트였다.
화려한 조명과 폭발적인 퍼포먼스로 펼쳐진 본선에서 최종 승자는 베트남의 가수 덕 푹(Đức Phúc)이었다. 그는 베트남 전설 속 영웅을 소재로 한 곡 Phù Đổng Thiên Vương(푸 동 티엔 부옹)을 선보이며 팝과 랩, 덥스텝을 결합한 강렬한 무대로 1위를 차지했다.
우승상금은 3,000만 루블(한화 약 5억원)에 달했다. 덕 푹은 10년 전 베트남 오디션 프로그램 The Voice of Vietnam(베트남의 목소리)에서 데뷔했으며 공개적으로 성 소수자임을 밝힌 가수라는 점에서 상징성이 크다. 러시아에서는 동성애 권리를 제한하는 법제가 유지되는 상황에서 그의 수상은 아이러니한 의미를 남겼다.
그러나 대회는 단순히 음악적 성취로만 평가되지는 않았다. 미국 대표로 예정됐던 브랜든 하워드는 본선 사흘 전 ‘가족 사정’을 이유로 하차했고, 호주 출신 가수 바시(Vassy)가 대체자로 지명됐다.
그러나 본선 직전, 사회자는 “호주 정부의 정치적 압력”으로 인해 바시가 공연할 수 없다고 발표했다. 이 과정은 대회 운영이 정치적 고려에 따라 결정되는 측면을 보여주는 사례로 해석됐다.
러시아 대표 가수 샤만(Shaman)은 공연 직후 국제 심사위원단에 러시아 무대를 채점 대상에서 제외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는 “러시아는 이미 많은 국가를 초청한 것만으로 승리했다”고 발언했다. 이는 대회 자체를 일종의 ‘문화적 승리’로 포장하려는 시도로 평가됐다.
러시아 정부는 인터비전을 단순한 음악 경연이라고 강조했지만 전문가들은 이를 국제 고립 속에서 문화적 영향력을 과시하려는 전략으로 해석한다. 푸틴 대통령은 중국 방문 당시 인터비전을 언급하며 외교 무대에서 홍보했고 외무장관 세르게이 라브로프도 대회 현장에 직접 등장해 인터뷰를 진행했다. 이는 러시아가 문화행사를 외교적 메시지 확산의 도구로 활용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한편, 유로비전 팬 커뮤니티는 인터비전을 대체로 무시하거나 비판적으로 받아들였다. 한 온라인 포럼에서는 “독재자와 전쟁범들이 벌이는 작은 파티일 뿐”이라는 날선 비판이 나오기도 했다. 또한 인터비전이 “전통적 보편적 가치”를 강조하며 성 소수자 친화적 문화를 배제한 점은 유로비전의 개방적 성격과 뚜렷한 대조를 이뤘다.
대회의 지속가능성은 불투명하다. 체제 차원의 강력한 추진력은 존재하지만 실제 음악 팬덤의 지지를 확보하지 못한다면 오래가기 어렵다는 지적이 나온다. 과거 체코슬로바키아와 폴란드에서 열린 인터비전이 사회 변동과 정치 변화 속에 금세 사라졌던 전례도 이를 뒷받침한다.
이번 대회 조직위는 2026년 차기 대회를 사우디아라비아에서 개최할 계획이라고 발표했다. 이는 러시아가 단순히 자국 내 행사를 넘어서 비서구권 국가들과 문화 네트워크를 확대하려는 의도와 맞닿아 있다. 그러나 정치적 의도와 음악적 정체성 사이의 긴장을 해소하지 못한다면, 인터비전은 장기적으로 팬덤의 무관심 속에 사라질 위험도 동시에 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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