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후위기 시대, ESG와 식량안보를 다시 생각할 때
- ESG와 식량안보가 우리의 미래를 지킨다
우리는 경제를 이야기할 때 금리와 환율, 유가와 주가를 먼저 떠올린다. 그러나 이제는 기후도 빼놓을 수 없는 경제 변수가 됐다. 적도 태평양에서 발생하는 작은 바닷물 온도 변화가 지구 반대편의 농산물 가격과 물류비, 에너지 가격, 나아가 세계경제의 흐름까지 흔들 수 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현상이 바로 ‘엘니뇨’다.
엘니뇨는 스페인어로 ‘아기 예수’를 뜻한다. 남미 페루와 에콰도르 연안의 어민들이 크리스마스 무렵 평소보다 따뜻해지는 바다와 어획량 감소를 경험하면서 붙인 이름이다.
쉽게 말하면 적도 부근 동태평양의 바닷물이 평소보다 따뜻해지는 현상이다. 평상시에는 무역풍이 동쪽에서 서쪽으로 불면서 따뜻한 바닷물을 인도네시아와 호주 쪽으로 밀어낸다. 그런데 엘니뇨가 발생하면 이 바람이 약해지고 따뜻한 바닷물이 태평양 동쪽으로 이동한다. 그 결과 바다에서 대기로 방출되는 열과 수증기의 위치가 달라지고, 대기순환이 바뀌면서 세계 곳곳의 비와 기온에도 영향을 미친다. 미국해양대기청(NOAA)은 엘니뇨가 평균 2~7년마다 발생하며 보통 9~12개월 지속된다고 설명한다.
엘니뇨의 가장 직접적인 충격을 받는 산업은 농업이다. 일부 지역에서는 가뭄이 심해지고 다른 지역에서는 폭우가 발생하면서 커피·코코아·쌀·밀·옥수수·설탕 등 주요 농산물의 생산과 공급이 불안정해질 수 있다. 생산량 감소는 국제 농산물 가격 상승으로 이어지고, 이는 식품기업의 원가와 소비자물가를 동시에 끌어올린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식량안보가 더 이상 농업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우리나라처럼 곡물과 에너지의 해외 의존도가 높은 국가에서는 세계적인 기후충격이 곧바로 국민의 밥상과 물가, 산업 경쟁력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기후위기가 심화할수록 ‘필요한 식량을 얼마나 싸게 살 수 있는가’보다 ‘위기 상황에서도 필요한 식량을 안정적으로 확보할 수 있는가’가 더욱 중요해진다. 식량비축 확대, 수입선 다변화, 국내 생산 기반 유지, 기후에 강한 품종 개발과 스마트농업 확대가 국가 식량안보의 핵심 과제가 되어야 하는 이유다.
이러한 변화는 기업의 ESG 경영에도 새로운 질문을 던진다. 지금까지 ESG의 환경(E)은 주로 탄소배출과 에너지 전환에 집중해 왔다. 그러나 기후위기가 공급망과 식량가격, 물류와 생산비에 영향을 미치는 시대에는 기후 리스크 자체가 기업의 경영 리스크다.
식품기업이라면 원료 농산물을 어느 국가에 의존하고 있는지, 특정 지역의 가뭄이나 홍수로 공급이 중단될 경우 대체 조달이 가능한지를 점검해야 한다. 제조업 역시 원자재와 에너지, 물류 공급망의 기후 취약성을 분석해야 한다. 단순히 탄소배출량을 줄이는 것만으로는 기후위기에 대응했다고 할 수 없다.
ESG의 S(사회) 측면에서도 식량안보는 중요한 의제가 된다. 식품 가격 급등은 저소득층과 취약계층에 더 큰 부담을 준다. 기후충격에 따른 식량 불평등을 완화하고 안정적인 먹거리를 공급하는 것은 기업의 사회적 책임과도 연결된다.
G(지배구조) 역시 중요하다. 기업 이사회가 기후위험을 재무위험으로 인식하고 공급망 다변화, 비상 조달체계, 기후정보 활용 등을 경영전략에 반영해야 한다. 이제 ESG는 ‘착한 기업’의 이미지가 아니라 기후위기 시대에 기업의 생존과 경쟁력을 결정하는 경영체계가 되어야 한다.
엘니뇨는 태평양에서 시작하지만, 그 파장은 세계 경제로 이어진다. 농산물 생산 감소는 식량 가격을 높이고, 가뭄은 수력발전과 산업용수에 영향을 미치며, 물류 차질은 운송비를 상승시킨다. 에너지와 원자재 가격까지 움직이면 인플레이션 압력은 더욱 커진다.
기후위기 시대에는 탄소배출을 얼마나 줄였는가와 함께 기후충격에 얼마나 잘 버틸 수 있는가가 중요하다. 정부는 식량비축과 국내 농업생산 기반을 강화하고 수입·물류 공급망을 다변화해야 한다. 농업은 기후 적응형 품종과 스마트농업을 확대해야 한다. 기업은 기후정보를 활용해 공급망의 취약성을 사전에 파악하고 대체 공급망과 비상 대응체계를 구축해야 한다.
기후변화와 엘니뇨를 별개의 문제로 볼 수도 없다. 엘니뇨는 자연적인 기후변동이지만, 지구온난화와 결합하여 '슈퍼 엘니뇨'와 같은 극단적 기상이변의 발생 빈도와 파급력을 더욱 증폭시키는 만큼, 극한 기상의 경제적 피해가 더욱 커질 가능성에 주목해야 한다. 따라서 기후변화 대응은 탄소중립이라는 ‘감축’에만 머물러서는 안 되며, 농업·식량·에너지·물류의 회복력을 높이는 ‘적응’까지 함께 추진해야 한다.
결국 식량안보는 ESG의 중요한 출발점이자 기후경제 시대의 국가 경쟁력이다. 기후충격에도 흔들리지 않는 식량·에너지·물류 공급망을 갖춘 국가와 기업이 미래 경제의 승자가 될 것이다.
덧붙이는 글 ㅣ 남재철 (서울대학교 특임교수, 前 기상청장)
기상청장을 역임하며 국가 기후 관측과 재해 대응 정책을 총괄했다. 국립기상과학원장, 수도권기상청장, 기상청 차장 등을 거치며 기상·기후 분야 전반에서 정책과 연구를 수행해 왔다. 세계기상기구(WMO) 집행이사 및 대기과학위원회 부의장을 맡아 국제 기후 협력에도 참여했다.
마르쿠스 Who’s Who 과학기술인명사전에 등재된 바 있으며, 홍조근정훈장을 수훈했다. 『6번째 대멸종 시그널, 식량 전쟁』의 저자이며, 현재 기후변화 대응, 기상재해, 식량안보 분야에서 연구와 자문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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