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Lee Su-ok's Spatial Resilience⑧] The Power of What Remains... Culturetank
서울 마포구 매봉산의 북사면, 한때 국가 비상용 석유를 저장하던 폐쇄된 시설이 오늘날 ‘문화비축기지’라는 이름으로 다시 숨을 쉰다. 한 세대 전만 해도 이곳은 ‘보이지 않는 국가의 심장’으로 불리며 외부의 시선에서 철저히 감춰져 있었다. 비상사태에 대비한 석유비축기지로서, 지도에서도 지워진 채 오랜 세월 동안 도시의 내부에 잠든 공간이었다.
그러나 지금, 그 숨겨진 장소는 전혀 다른 존재로 되살아났다. 과거의 긴장과 불안이 켜켜이 쌓였던 곳은 이제 시민의 기억과 감성이 교차하는 열린 문화의 장으로 변화했다. 산업사회의 흔적이 사라지지 않고 남아 새로운 의미를 품게 되면서, 이 공간은 도시가 스스로를 치유하는 상징이 되었다.
산업의 흔적 위에 피어난 새로운 숨결
문화비축기지의 역사는 1970년대 세계적 석유파동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급격한 산업화와 에너지 불안 속에서 정부는 매봉산 지하에 대형 석유 저장시설을 구축했다. 지형을 절개하고 방호 옹벽을 세운 뒤, 지름 30미터가 넘는 강철 탱크 다섯 기가 산 아래에 묻혔다. 약 39만 배럴의 원유를 저장하던 이곳은 국가의 비상 에너지 공급망을 담당한 철저한 통제시설이었다. 그 시절 이 공간은 ‘보이지 않음’을 전제로 만들어졌다. 지도에도 표시되지 않았고, 내부 구조는 비밀로 유지되었다. 이 비가시성은 산업화 시대가 지닌 불안과 폐쇄의 감성을 대변했다.
2000년대 초, 인근 월드컵 경기장 건설로 인해 위험시설로 지정되면서 기능을 멈추었고, 14년 동안 방치되었다. 그러나 그 침묵의 시간은 도시가 스스로의 흔적을 되돌아볼 준비의 시간이 되었다. ‘비상’의 시간은 퇴적물이 되었고, 그 위로 시민사회의 일상이 서서히 쌓이기 시작했다.
시간의 결이 쌓인 도시의 서사
2017년, 서울은 이 공간을 지우지 않았다. 낡은 구조를 철거하는 대신, 그 안에 남아 있던 시간의 층위를 새로운 이야기의 재료로 삼았다. 콘크리트의 균열, 녹슨 철판의 질감, 탱크 내부의 울림은 과거의 시간을 품은 건축적 언어로 남겨졌다. 새것으로 덮지 않고 오래된 것을 드러내는 선택은 도시의 시간과 감정이 공존하는 방식을 택한 결정이었다.
이 선택은 ‘완공’이 아니라 ‘독해’를 가능하게 했다. 과거를 보존하는 행위가 아니라, 과거를 읽고 현재의 의미로 번역하는 행위가 이곳의 출발점이 되었다.
문화비축기지를 구성하는 여섯 개의 탱크(T1~T6)는 각기 다른 방식으로 이 기억을 이어간다. T1은 투명한 유리 파빌리온으로 재구성되어 빛이 내부를 가로지르며 어둠을 투명한 현재로 바꾸고, T2는 공연장으로 변형되어 옹벽이 무대의 배경으로 남았다. T3의 원형 탱크는 손대지 않은 채 보존되어 철의 산화와 침묵이 산업사회의 흔적을 증언한다. T4 복합문화공간은 과거의 통제 통로를 관람자의 동선으로 바꾸어 걷는 행위 자체가 시간의 벽을 통과하는 경험이 되게 했다. T5는 전시와 기록의 결합을 통해 기능적 질서를 서사적 질서로 전환했고, T6 커뮤니티센터는 재활용된 철판을 내외장에 사용하여 물질의 순환과 사회적 중심성을 함께 드러냈다. 이 여섯 개의 탱크가 만들어내는 리듬은 도시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동시에 호흡하는 하나의 유기적 문장과도 같다.
잔여가 서사가 되는 순간
오래된 탱크들이 남겨진 장소에 들어서는 순간, 방문자는 완성된 건축이 아니라 시간이 머무는 흔적과 마주한다. 벽에는 균열이 남고, 철판에는 녹이 스며 있다. 그 거친 질감들은 도시의 오래된 호흡을 전하는 피부처럼, 과거의 시간을 지금 이곳으로 불러낸다. 완전함은 이 공간의 목표가 아니다. 오히려 불완전함이 감응의 언어가 되어, 공간은 완성이 아니라 끊임없는 과정으로 존재한다.
빛은 천천히 벽면을 따라 미끄러지고, 발소리는 둔탁한 울림으로 퍼진다. 이 울림은 단순한 소리가 아니다. 과거의 산업적 긴장과 현재의 정서가 교차하며 만들어내는 감정의 공명이다. 금속의 냄새, 벽의 차가운 결, 공기 중에 남은 습도는 모두 시간의 입자로 존재하며, 사람은 그 안에서 시각뿐 아니라 청각과 촉각, 그리고 기억으로 공간을 체험한다.
이 불완전함은 불편함이 아니다. 그것은 멈춰 있던 감각을 깨우는 장치이며, 오래된 재료의 질감은 인간의 기억을 불러내고, 균열 사이로 스며드는 빛은 과거와 현재를 잇는 다리가 된다. 폐허는 잔재가 아니라 서사의 원형, 도시의 감정을 다시 써 내려가는 매개로 존재한다. 완벽하게 지워진 장소보다, 흠집이 남은 기억 속에서 더 많은 이야기가 태어난다. 이 공간에서 도시의 시간은 멈추지 않고, 다시 흐르기 시작한다.
서울둘레길에서 만나는 도시의 숨결
서울둘레길의 한 구간은 매봉산 자락에서 시작해 문화비축기지를 지나 월드컵경기장과 불광천으로 이어지는 순환적 흐름을 형성한다. 이 길은 자연의 지형과 산업의 흔적이 공존하는 서울의 풍경 속에서 도시의 숨결을 가장 진하게 느낄 수 있는 구간이다. 완만하게 이어지는 산책로는 마포와 서대문, 월드컵공원을 잇는 경계이자 연결선으로, 도시가 품은 과거와 현재가 한 걸음의 리듬으로 이어지는 시간의 통로가 된다. 이곳에서의 걷기는 단순한 이동이 아닌, 시간의 층위를 밟아가는 행위로 확장된다. 녹슨 철재 구조물 사이로 스며드는 빛과 담쟁이덩굴의 흔적은 세월의 결을 드러내고, 걷는 이의 발걸음은 산업화의 기억과 도시 재생의 감각을 동시에 체험하게 한다. 과거 석유비축시설이었던 공간이 시민의 일상과 문화를 담는 공공의 무대로 전환되면서, 산업의 상처와 회복의 과정이 중첩된 서사적 풍경이 형성된다.
길을 걷는 사람들은 저마다의 시간과 기억을 품고 있다. 어떤 이는 산업화 시대의 풍경을 떠올리고, 또 다른 이는 아이와 함께 도시의 변화를 이야기한다. 나무 사이로 비치는 햇살을 바라보며 오늘의 평화를 느끼는 사람도 있다. 이러한 다양한 발걸음들이 겹쳐지며, 도시의 삶이 호흡하는 리듬이 만들어진다. 이 구간은 단순한 산책로가 아니라, 시민이 함께 걷고 체험하며 도시의 시간을 기록하는 장이다. 도시의 풍경은 완성된 형태가 아니라, 사람들의 일상 속에서 살아 움직이며 갱신되는 과정적 존재로 드러난다. 길을 걷는다는 것은 곧, 도시의 기억과 자연의 시간 속을 천천히 호흡하는 일이다.
시민이 함께 만드는 도시의 회복
도시의 회복은 물리적 재생보다 운영의 방식에서 시작된다. 문화비축기지는 행정이 설계한 공간이 아니라, 시민이 완성한 공간이다. 운영은 시민·전문가·공무원이 함께 참여하는 협력형 거버넌스로 이루어진다. 기획과 실행, 운영 전반에 시민이 실질적으로 관여하며, 프로그램의 방향을 정하고 공간 활용 방식을 논의한다.
이 과정에서 공간은 행정의 대상이 아닌 사회적 실험의 장으로 변모한다. 협력 구조 안에서 시간은 다른 속도를 가진다. 단발적인 축제가 아니라, 시민 간의 신뢰가 쌓이는 ‘관계의 시간’이 된다. 참여의 경험이 축적될수록 도시는 기억을 형성하고, 그 기억이 공동체의 자산으로 환류된다. 시민의 참여는 도시가 자기를 학습하는 과정이며, 제도를 신뢰로 바꾸는 매개이다.
공공의 논의는 새로운 문화정책의 실험이 되고, 일상의 사용은 지속가능한 도시운영의 모델이 된다. 도시의 회복은 속도보다 방향, 계획보다 참여에 있다. 눈에 보이는 성과가 아닌, 시간이 만든 신뢰의 구조 속에서 도시는 비로소 숨을 고르고 다시 살아난다.
남겨두는 용기, 다시 살아나는 도시
도시는 언제나 새로움을 갈망하지만, 진정한 혁신은 파괴가 아니라 남겨두는 용기에서 비롯된다. 과거의 흔적을 지우지 않고 품는 행위, 그 안에서 새로운 이야기를 길어 올리는 태도야말로 도시가 스스로를 회복하는 방법이다. 서울 마포의 매봉산 기슭에 자리한 거대한 탱크들은 한때 국가의 비상 에너지를 저장하던 시설이었다. 그러나 지금 그 탱크들은 더 이상 석유를 저장하지 않는다. 대신 사람들의 감정, 예술의 흔적, 사회의 목소리를 품고 있다. 침묵하던 구조물들은 이제 도시의 리듬에 귀를 기울이며 조용히 속삭인다.
“나는 과거의 유물이 아니다. 나는 지금도 너희와 함께 숨 쉬고 있다.”
이 문장은 선언이 아니라 시간의 증언이다. 산업사회의 기억으로 남았던 공간은 오늘날 시민이 함께 배우고 토론하는 공공의 무대가 되었다. 남겨진 구조물은 더 이상 낡은 흔적이 아니라, 새로운 의미를 창조하는 시간의 장치로 작동한다.
서울둘레길을 따라 걸어온 시민들은 이곳에서 발걸음을 멈추고 숨을 고른다. 그들의 시선이 녹슨 철판에, 그리고 빛이 스며드는 틈에 머무는 순간, 도시의 시간은 다시 이어진다. 남겨진 것은 단지 잔재가 아니다. 그것은 시간을 품은 기억이며, 그 기억이야말로 도시를 앞으로 이끄는 힘이다. 과거의 흔적을 지우지 않고 받아들일 때, 과거는 미래의 자원이 되고, 기억은 가능성으로 전환된다.
그리하여 도시는 다시 호흡하기 시작한다.
과거에서 미래로, 기억에서 창조로, 그리고 시민의 발걸음 속으로 ... 조용하지만 단단한 회복의 숨결이 피어난다.
덧붙이는 글 | 이수옥(Lee Su Ok)
국민대학교 디자인대학원 실내설계 전공 석사 학위를 취득한 후, 현재 동 일반대학원 박사 과정에 재학중이다. 학술 연구의 일환으로 유휴 산업시설을 활용한 복합문화공간의 리질리언스 공간 특성에 대해 연구하고 있다. 특히, 리질리언스 연구는 기존 산업유산을 단순히 보존의 대상으로 한정하지 않고 현대 도시 안에서 지속가능한 문화·사회적 기능을 수행할 수 있는 공간으로 재해석하여 도시재생과 공간 정의의 관점에서 의미 있는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더불어, ㈜한국이러닝교육원에서 강사로 활동하며 디자인 및 공간 관련 교육 콘텐츠를 개발하고 있으며, 한국 ESG위원회 인권전략위원장으로서 사회적 책임과 지속가능성을 중심으로 한 다양한 활동에 참여하고 있다. 현재 연구 분야는 도시재생과 산업유산 재생, 문화유산의 활용 방안에 대해 보다 실제적이고 통합적인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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