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난이 더 비싼 세상을 뒤집다
호세 마누엘 몰러(José Manuel Moller)의 문제의식은 거창한 연구실이나 회의장이 아니라 칠레 산티아고 외곽의 저소득 주거지역에서 시작됐다. 대학생이던 그는 친구들과 함께 살며 집안의 장보기를 맡았는데, 그 과정에서 자신이 살던 동네와 도심의 생활비 구조가 전혀 다르다는 사실을 체감했다. 대형 슈퍼마켓이 밀집한 지역과 달리 그가 살던 곳에서는 주민들이 소규모 동네 상점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식용유, 콩, 세제 같은 필수품은 소량으로 포장돼 있었고 가격은 오히려 더 비쌌다. 같은 제품을 벌크로 살 수 있는 지역보다 최대 60%까지 더 지불해야 했다.
몰러는 이 현상을 단순한 개인의 불운이나 지역 격차로 보지 않았다. 그는 이를 ‘빈곤세(poverty tax)’라고 불렀다. 가난하다는 이유만으로 더 비싼 가격을 내고 그 대가로 과도한 플라스틱 포장과 쓰레기까지 떠안는 구조였다. 플라스틱 포장은 제품 가격을 올리는 요인이 되었고 사용 후에는 다시 그 지역의 환경 문제로 되돌아왔다. 소비 구조 자체가 저소득층에게 경제적·환경적 부담을 동시에 지우고 있었던 것이다. 몰러는 “무언가 명백히 불공정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고 회상한다. 문제를 해결하려면 개인의 선택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시스템 자체를 바꿔야 한다고 그는 판단했다.
이 문제의식은 2012년 사회적 기업 알그라모(Algramo)의 설립으로 이어졌다. ‘그램 단위로’라는 뜻의 이 이름에는 그의 철학이 담겨 있었다. 알그라모의 핵심은 단순하지만 급진적이다. 플라스틱 일회용 포장을 최소화하고, 재사용 가능한 용기를 통해 생활필수품을 필요한 만큼만 구매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소비자는 세제나 주방 세정제 같은 제품을 그램 단위로 살 수 있고 구매량과 상관없이 동일한 단가를 적용받는다. 소량 구매가 곧 ‘비싼 선택’이 되는 기존 구조를 뒤집은 것이다.
알그라모는 칠레의 동네 상점과 협력해 재사용 용기 시스템을 도입했고 대형 유통 매장에는 리필 스테이션을 설치했다. 소비자는 빈 용기를 가져와 필요한 만큼 채우고 다시 그 용기를 반복해서 사용한다. 여기에 기술이 더해졌다. 각 용기에는 RFID 기반 태그가 부착돼 구매 이력이 기록되고 용기를 재사용할 때마다 소액의 현금성 보상이 제공된다. 이 보상은 가상 지갑에 적립돼 다음 구매 시 할인으로 사용할 수 있다. 환경을 위한 행동이 도덕적 선택이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이득이 되는 구조다.
몰러는 지속가능성이 특정 계층의 전유물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해 왔다. 그는 “지속가능한 해결책이 고소득층이나 환경 의식이 높은 사람들만을 위한 것이라면 그것은 결코 주류가 될 수 없다”고 말한다. 알그라모의 설계는 신념이나 윤리에 호소하기보다 가격과 편의성이라는 현실적인 기준에 맞춰져 있다. 그 결과, 2020년 이후 알그라모 고객들은 90만 개가 넘는 플라스틱 포장재를 재사용했고, 100톤 이상의 플라스틱이 폐기물로 버려지는 것을 막았다.
이 실험은 칠레를 넘어 국제 무대로 확장되고 있다. 알그라모는 영국 버밍엄의 리들(Lidl) 매장에서 세제 리필 서비스를 운영하고 있으며, 미국에서는 월마트와 타깃(Target)과의 협업을 추진했다. 인도네시아에서는 네슬레와 함께 초콜릿 음료 제품에 대한 리필 파일럿 프로젝트를 진행했고 멕시코 시장 진출도 준비 중이다. 몰러는 자신이 세제를 팔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산업의 방향을 바꾸고 있다고 말한다. 그의 목표는 특정 제품의 성공이 아니라 포장과 유통 전반의 패러다임 전환이다.
플라스틱 문제는 단순한 쓰레기 문제가 아니다. 화석연료 기반 플라스틱의 생산과 사용, 폐기 과정은 전 세계 온실가스 배출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며, 기후 위기를 가속한다. 재활용률이 10%에도 미치지 못하는 현실에서 몰러는 재활용보다 재사용이 훨씬 근본적인 해법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 재사용을 가능하게 하는 핵심은 기술 그 자체보다도 가격과 유통 구조의 재설계다.
이러한 공로로 몰러는 2023년 유엔 환경계획(UNEP)이 선정한 ‘지구 챔피언상(Champion of the Earth)’ 기업가 비전 부문 수상자로 이름을 올렸다. 그는 현재 유엔 제로웨이스트 자문위원회 부의장으로 활동하며 국제 사회에 플라스틱 감축과 재사용 시스템의 필요성을 알리고 있다. 다만 그는 사회적 기업의 노력만으로는 한계가 분명하다고 말한다. 기업이 규제 이상으로 행동하도록 만들기 위해서는 정부와 제도의 역할이 필수적이라는 것이다.
기후 과학자들이 수십 년 전부터 데이터와 모델로 위기의 실체를 경고해 왔다면, 몰러는 일상의 소비 현장에서 그 위기가 어떻게 불평등으로 작동하는지를 보여준다. 기후 위기는 대기 중의 수치나 먼 미래의 시나리오에만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가난한 동네의 높은 물가, 과도한 포장, 선택권 없는 소비 속에 이미 스며들어 있다. 몰러가 던지는 질문은 단순하지만 무겁다. 이 비효율적이고 불공정한 시스템을 우리는 언제까지 그대로 둘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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