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美 3000만 건 사망 기록 분석…가정용 에어컨으로 연평균 5267명 폭염 관련 사망 예방
- 냉방 사용 일정 수준 넘으면 추가 사망 감소 효과는 제한적
- UNEP “2050년 냉방 수요 3배 이상…온실가스 배출 72억 톤 전망”
기후위기로 폭염이 심해지는 가운데 에어컨이 실제로 수천 명의 생명을 구하고 있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그러나 세계적으로 냉방 수요가 빠르게 증가하면서 전력 소비와 온실가스 배출 증가가 우려돼, 폭염으로부터 사람을 보호하면서 냉방의 탄소 배출을 어떻게 줄일 것인지가 새로운 과제로 떠오르고 있다.
국제학술지 Nature Health에 8월 31일 발표된 ‘미국 가정용 에어컨 사용이 폭염 관련 사망에 미치는 영향(Impact of household air conditioning usage on heat-related mortality in the USA)’ 연구에 따르면 미국에서 가정용 에어컨 사용으로 연평균 약 5267명의 폭염 관련 사망을 예방한 것으로 추정됐다.
예일대 공중보건대학원과 환경대학원 연구진은 2010년부터 2020년까지 미국 본토에서 발생한 약 3000만 건의 사망 기록을 바탕으로 지역별 기온과 가정용 에어컨 사용량, 사망 위험의 관계를 분석했다.
연구 결과 냉방 이용이 적은 지역에서 에어컨 사용량이 일정 수준까지 증가할수록 고온에 따른 사망 위험이 뚜렷하게 낮아졌다.
에어컨 사용량이 하위 10% 수준인 지역에서는 해당 지역 기온 분포의 상위 5%에 해당하는 고온에서 사망 위험이 사망 위험이 가장 낮은 기온보다 2.2% 높았다. 반면 에어컨 사용량이 미국 중간 수준인 지역에서는 이 같은 추가 사망 위험이 0.8%로 낮아졌으며, 통계적으로 유의한 차이가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나 냉방 사용량이 중간 수준을 넘어 더 증가하자 사망 위험 감소 효과는 정체되는 양상을 보였다. 연구진은 이를 일정 수준 이상의 에어컨 사용에서는 건강 보호 효과가 포화될 가능성을 보여주는 결과로 분석했다.
전체적으로 가정용 에어컨 사용은 미국에서 연평균 5267명의 폭염 관련 사망을 예방했으며, 폭염에 기인한 사망을 절반 이상 줄인 것으로 추정됐다.
이번 연구는 에어컨 보유 여부가 아니라 실제 사용량을 분석했다는 점에서도 기존 연구와 차이가 있다.
에어컨이 설치돼 있어도 전기요금 등의 이유로 실제 사용하지 못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연구진은 지역별 가정의 냉방 전력 사용량을 활용해 실제 에어컨 이용 수준을 추정했다.
연구 결과는 폭염 대응에서 냉방 접근성을 높이는 것이 중요하지만 단순히 에어컨 사용량을 계속 늘리는 것이 최선의 방법은 아니라는 점을 동시에 보여준다.
특히 냉방 이용이 낮은 지역에서 에어컨 사용 확대에 따른 사망 위험 감소 효과가 크게 나타난 만큼, 폭염에 취약하면서도 냉방 이용이 어려운 계층과 지역에 냉방 접근성을 높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다만 이번 연구만으로 에어컨 사용에 따른 전체적인 건강·기후 영향을 판단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연구진은 에어컨 사용에 필요한 전력을 생산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대기오염 등 부정적인 건강 영향을 이번 분석에 포함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개인별 에어컨 사용량이 아닌 지역 단위의 평균 사용량을 분석했다는 점도 연구의 한계다.
냉방 확대에 따른 기후 영향은 별도의 국제기구 분석에서 확인된다.
유엔환경계획(UNEP)이 지난해 발표한 ‘Global Cooling Watch 2025’에 따르면 현재와 같은 추세가 이어질 경우 세계 냉방 수요는 2050년까지 2022년 대비 세 배 이상으로 증가할 것으로 전망된다.
인구와 소득 증가, 극심한 폭염의 확대와 함께 저소득 국가에서도 냉방기기 보급이 늘어날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문제는 냉방 수요 증가에 따른 온실가스 배출이다.
UNEP는 별도의 추가 대책이 없을 경우 전 세계 냉방 관련 온실가스 배출량이 2022년 약 41억 톤의 이산화탄소환산량(CO₂e)에서 2050년 약 72억 톤으로 증가할 것으로 전망했다. 현재 수준의 거의 두 배다.
여기서 말하는 ‘냉방 관련 배출’은 가정용 에어컨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건물의 공간 냉방뿐 아니라 산업용 냉방과 식품·의약품 등을 위한 콜드체인 등 냉방 부문 전반에서 발생하는 배출을 의미한다.
냉방이 온실가스 배출로 이어지는 경로는 크게 전력과 냉매다.
에어컨 등 냉방기기에 사용하는 전력을 석탄과 천연가스 같은 화석연료로 생산하면 냉방 수요가 늘어날수록 온실가스 배출도 증가할 수 있다. 냉방기기에 사용되는 수소불화탄소(HFCs) 등 일부 냉매 역시 강력한 온실가스다.
기후위기가 심해질수록 이 문제는 더욱 복잡해진다. 기온 상승과 폭염 증가는 냉방 수요를 높이고, 증가한 냉방 수요를 화석연료 중심의 전력으로 충당할 경우 다시 온실가스 배출을 늘리는 악순환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냉방 자체를 줄이는 것이 해결책은 아니다.
UNEP는 폭염을 가장 치명적인 기후위험 가운데 하나로 규정하면서 냉방을 물과 에너지, 위생시설과 마찬가지로 생명과 사회 기능을 유지하기 위한 필수 인프라로 바라봐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이에 따라 필요한 것은 냉방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같은 냉방 효과를 더 적은 에너지와 온실가스 배출로 제공하는 것이다.
UNEP는 건물 단열과 차양, 자연환기와 녹지 등을 이용해 실내 온도 상승을 억제하는 수동형 냉방(passive cooling)을 우선하고, 에너지 효율이 높은 냉방기기를 확대하는 동시에 지구온난화 영향이 큰 냉매 사용을 줄이는 방안을 제시했다.
이 같은 ‘지속가능한 냉방 경로(Sustainable Cooling Pathway)’를 적용하면 2050년 냉방 관련 온실가스 배출량을 별도의 추가 대책이 없을 경우 예상되는 72억 톤에서 약 26억 톤으로 64% 줄일 수 있다는 것이 UNEP의 분석이다.
여기에 전력 생산의 탈탄소화까지 빠르게 진행될 경우 2050년 냉방 관련 배출량은 기존 전망보다 최대 97%까지 줄일 수 있을 것으로 전망했다.
이번 예일대 연구와 UNEP의 분석은 기후위기 시대 냉방이 가진 두 가지 측면을 동시에 보여준다.
폭염 속에서 냉방은 사람의 생명을 보호하는 중요한 기후적응 수단이다. 특히 냉방 이용이 부족한 지역과 계층에 대한 접근성을 높일 필요가 있다. 동시에 냉방 수요의 급격한 증가를 현재와 같은 에너지 구조로 감당한다면 온실가스 배출을 증가시켜 장기적으로 기후위기를 악화시킬 가능성이 있다.
결국 과제는 에어컨을 켤 것인가 말 것인가가 아니다. 폭염으로부터 사람을 보호하면서도 그 냉방을 얼마나 적은 에너지와 탄소로 제공할 것인가가 기후위기 시대의 새로운 과제로 떠오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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