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 전쟁의 향방을 가를 새로운 외교적 국면이 열리고 있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기존보다 한층 유연해진 평화 구상을 공개하며, 사실상 협상의 주도권을 러시아로 넘겼기 때문이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최근 기자들과의 이례적으로 솔직한 자리에서 미국과 조율해 마련한 20개 항의 평화안 초안을 설명하며, 이를 “전쟁을 끝내기 위한 기본 문서이자 우크라이나·미국·유럽·러시아 간 정치적 합의의 출발점”이라고 규정했다.
이번 평화안은 미국이 앞서 러시아와 논의했던 28개 항 제안을 축소·정리한 것으로 우크라이나가 수용할 수 있는 현실적 타협의 범위를 제시한 것이 특징이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특히 초기 협상을 교착 상태에 빠뜨렸던 몇몇 핵심 쟁점에 대해 조건부 양보 가능성을 시사하며 러시아의 응답을 기다리고 있다고 밝혔다. 그는 미국이 크렘린궁과 협의한 뒤 조만간 모스크바의 공식 답변이 나올 것으로 기대한다고 덧붙였다.
평화안의 중심에는 우크라이나의 주권을 명확히 확인하고 러시아와의 불가침 조약을 체결하는 구상이 놓여 있다. 여기에 미국과 나토, 유럽 국가들이 참여하는 강력한 안보 보장 체계가 포함됐다. 이 안보 보장은 나토의 집단방위 원칙과 유사하게 러시아가 다시 우크라이나를 침공할 경우 군사적 대응과 제재 복원을 약속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다만 우크라이나가 도발 없이 러시아 영토를 공격할 경우에는 이러한 보장이 철회된다는 단서도 달렸다.
가장 민감한 쟁점인 영토 문제와 관련해 젤렌스키 대통령은 제한적이고 조건부인 타협 구상을 설명했다. 그는 우크라이나군이 현재 러시아군이 점령하지 않은 도네츠크 지역 일부에서 철수할 수 있는 조건으로 러시아 역시 동일한 규모만큼 병력을 후퇴시켜 전선 주변에 비무장지대를 설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과정에서 크라마토르스크와 슬로비안스크 등 동부의 요새화된 도시들을 포함한 지역을 ‘자유경제구역’으로 설정하는 방안도 거론됐다. 러시아가 요구해 온 도네츠크 전역 양도와는 분명한 선을 그으면서도 협상 가능성을 열어둔 셈이다.
경제 회복과 전후 재건에 대한 구상도 평화안의 중요한 축을 이룬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전쟁으로 인한 우크라이나의 경제적 손실이 약 8천억 달러에 달한다고 밝히며 기술·데이터센터·인공지능 분야에 투자하는 우크라이나 개발 기금 설립과 미국 기업의 천연가스 부문 투자를 포함한 대규모 재건 패키지를 제안했다. 또한 현재 러시아가 점령 중인 자포리자 원자력 발전소에 대해서는 미·우 합작 회사를 통한 운영 절충안도 제시했다.
이행 구조 역시 구체적으로 설계됐다. 모든 당사자가 합의에 도달하는 즉시 전면 휴전을 발효하고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의장을 맡는 평화위원회가 합의 이행을 감시·보장하는 방안이 포함됐다. 러시아군은 드니프로페트로프스크, 미콜라이우, 수미, 하르키우 지역에서 철수하는 것이 명시됐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전쟁 종식을 공식화하는 과정에서 국민투표 가능성도 언급했다. 그는 국민들이 “이 결말이 우리에게 적합한지 아닌지”를 선택할 권리가 있다고 말하면서도,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최소 60일간의 진정한 휴전과 안전한 환경이 전제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러시아가 통제하는 지역에서는 공정한 투표를 기대하기 어렵다는 점도 분명히 했다.
한편 러시아는 아직 평화안에 대한 명확한 입장을 내놓지 않고 있다. 크렘린궁은 협상과 관련한 공개 발언을 자제하며 내부 검토가 진행 중이라는 원론적 입장만을 밝혔다. 최근 미국 중재 하에 양측 대표단 간 접촉이 이어지고 있는 가운데 외신들은 이번 평화안이 우크라이나와 미국의 공동 입장을 상당 부분 반영한 진전된 안이지만 영토와 철군 문제를 둘러싼 근본적인 간극은 여전히 남아 있다고 분석하고 있다.
국제사회는 젤렌스키 대통령의 이번 제안을 전쟁 종식을 향한 중요한 신호로 평가하면서도 공이 러시아로 넘어간 지금이 협상의 분수령이 될 것으로 보고 있다. 러시아가 어떤 답을 내놓느냐에 따라 장기화된 전쟁이 외교의 길로 접어들 수 있을지 여부가 결정될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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