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이드라인에서 인증 표준으로… ISO 19600이 연 ‘컴플라이언스 경영’의 전환점
현재 글로벌 비즈니스 무대에서 가장 뜨거운 화두 중 하나는 ‘ISO 37301(컴플라이언스 경영시스템)’ 인증이다. 수많은 기업이 이 국제표준을 획득하기 위해 전사적인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하지만 지금의 ISO 37301이 하루아침에 완성된 것은 아니다. 그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2014년에 탄생한 ‘ISO 19600’이라는 훌륭한 뼈대가 존재한다. 필자는 2012년 이 표준의 드래프트(Draft, 초안) 버전을 접하고 번역 작업을 시작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ISO 37301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전신인 ISO 19600의 발자취를 돌아보는 것이 필수적이다.
글로벌 규제 폭발과 ISO 19600의 탄생
2010년대 초반, 다국적 기업들은 거대한 규제의 파도에 직면했다. 미국의 해외부패방지법(FCPA), 영국의 뇌물방지법(Bribery Act) 등 각국의 컴플라이언스 요구가 국경을 넘어 강력하게 적용되기 시작한 것이다. 기업들은 자국의 법만 지켜서는 글로벌 무대에서 생존할 수 없음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이러한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여 국제표준화기구(ISO)는 2014년 ‘ISO 19600: Compliance Management Systems – Guidelines’를 발표했다. 이는 세계 최초로 컴플라이언스 경영시스템(CMS)에 대한 국제적 가이드라인을 제시한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왜 ‘요구사항’이 아닌 ‘가이드라인’이었을까?
ISO 19600의 가장 큰 특징은 제3자 인증을 받아야 하는 엄격한 ‘요구사항(Requirement)’이 아니라, 기업이 참고하고 자발적으로 따를 수 있는 ‘지침서(Guideline)’ 형태로 제정되었다는 점이다.
여기에는 현실적인 고민이 숨어 있었다. 국가마다 법률 체계, 관습, 사회적 규범, 조직 문화가 너무도 달라 이를 전 세계 공통의 통일된 강제 표준으로 묶어내기에는 무리가 따랐다. 또한 규제가 촘촘한 선진국에 비해 개발도상국 기업들에게 강력한 인증 제도는 자칫 참여 의지를 꺾는 진입장벽이 될 수 있었다. 따라서 ISO는 강제성보다는 자발적인 도입과 참고를 독려하기 위해 가이드라인의 형태를 취한 것이다.
법무팀의 업무에서 ‘전사적 경영전략’으로의 패러다임 전환
ISO 19600이 컴플라이언스 역사에 남긴 가장 위대한 업적은 바로 패러다임의 전환이다. 과거 컴플라이언스는 문제 발생 시 법적 리스크를 검토하는 법무팀이나 감사팀의 ‘사후 처리 업무’쯤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ISO 19600은 컴플라이언스를 조직의 의사결정 프로세스 전반에 통합해야 하는 ‘경영시스템(Management Systems) 전략’으로 격상시켰다. 경영진이 주도하는 톱다운(Top-Down) 방식을 명문화하고, 단순한 법규 준수를 넘어 윤리·투명성 등 광의의 원칙을 포괄했으며, Plan-Do-Check-Act(PDCA) 사이클을 도입해 시스템이 지속적으로 살아서 움직이도록 설계했다.
한국에서의 역설: 가이드라인의 인증화
ISO 19600은 수출 중심의 한국 기업들에게 복잡한 글로벌 법적·규제적 요구사항을 통합 관리할 수 있는 훌륭한 프레임워크를 제공했다. 이 가이드라인 덕분에 한국 기업들은 국경을 넘는 비즈니스 활동에서 리스크를 줄이고 윤리적 기준을 높일 수 있었다.
그러나 한국 시장에서는 웃지 못할 촌극도 벌어졌다. ISO 19600은 애초에 제3자 인증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표준이 아니었다. 국제표준화기구(ISO)와 국제인정기구포럼(IAF)은 가이드라인에 대한 인증이 불가함을 지속적으로 경고하고 반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독 대한민국에서만 일부 인증기관들이 ISO 19600을 ‘제3자 인증 서비스’로 둔갑시켜 기업들에 발급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는 컴플라이언스의 실효성을 스스로 깎아내리는 안타까운 행태였다.
ISO 37301을 향한 위대한 디딤돌
비록 한계는 있었지만, ISO 19600은 전 세계 기업들에게 ‘컴플라이언스 경영시스템’이라는 새로운 지평을 열어주었다. 이 가이드라인을 통해 기업들은 준법경영이 단순한 규제 회피가 아니라 조직의 지속가능성을 담보하는 핵심 경영 기법임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인식의 확산과 더욱 강력한 글로벌 기준에 대한 갈증은 마침내 2021년 제3자 인증이 가능한 완벽한 형태의 요구사항인 ISO 37301의 제정으로 이어지게 된다. 가이드라인에서 인증 표준으로의 진화, 다음 칼럼에서는 본격적으로 ISO 37301이 글로벌 비즈니스 환경을 어떻게 바꿔놓고 있는지 그 생생한 개발 과정과 특징을 다루고자 한다.
덧붙이는 글 ㅣ 용석광 (Yong Seok Kwang)
세종대학교 경영학과에서 ESG 경영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경영학적 통찰과 실무 전략으로 기업의 지속가능한 성장을 돕는 ESG 및 준법경영 전문가이다. 현재 ESGi 대표이사이자 대학의 겸임교수와 학회 이사로 활동하며 후학 양성과 연구에 매진하고 있다. 또한 다수 기업 및 공공기관의 자문위원으로서 윤리·인권 경영 체계 확립을 이끌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실무 현장의 핵심 지침을 담은 《Compliance 공정거래 CP&ISO 37301 실무가이드》, 《ESG와 윤리·준법경영.ZIP》, 그리고 《ESG 경영의 근간 컴플라이언스 솔루션.ZIP》 등이 있다. 저술 활동과 강연을 통해 기업들이 규범 준수를 넘어 지속가능한 경영 문화를 구축할 수 있도록 실천적인 로드맵을 제시하고 있다.
BEST 뉴스
-
[남재철의 기후&식량안보⑨] 폭염은 소리 없는 살인자, 이제는 국가가 응답해야 한다
▲ [남재철의 기후&식량안보] 폭염은 소리없는 살인자 [사진=Ai, 남재철] 올여름도 어김없이 폭염이 한반도를 뒤덮고 있다. 연일 이어지는 기록적인 고온과 밤에도 식지 않는 열대야는 국민의 일상을 위협하고 있으며, 온열질환자와 사망자가 증가하고 있다. 유럽과 미국, 중국, ... -
[기고] 배우 유준상, ESG를 공부하다
[편집자주] 이 글은 배우 유준상 님이 제5기 한국ESG경영 최고위과정을 수료한 뒤, ESG에 대한 배움과 생각을 직접 작성해 ESG코리아뉴스에 보내온 기고문입니다. ▲ 유준상 배우 [사진출처=숨우주예술연구소] 나는 배우다. 오랜 시간 ... -
[윤재은 칼럼] 지금의 여름이, 인류가 경험한 가장 차가운 여름일지도 모른다
▲ 기사의 이해을 돕기 위한 AI 생성 이미지 [사진=gemini 생성이미지] 올여름, 우리는 40℃를 넘나드는 폭염을 경험하고 있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상상하기 어려웠던 기온이 이제는 일상이 되어가고 있다. 에어컨은 생존을 위한 필수품이 되었고, 밤에도 식지 않는 열... -
[용석광의 컴플라이언스와 ESG] ㉑ 공정거래법의 주요 내용과 발전 과정: 13개 법률로 완성된 공정 경제의 인프라
▲ 용석광의 컴플라이언스와 ESG, 공정거래법의 주요 내용과 발전 과정: 13개 법률로 완성된 공정 경제의 인프라 [사진=Ai] 대한민국 기업 현장에서 '컴플라이언스'를 논할 때 결코 빠질 수 없는 뼈대가 바로 공정거래법이다. 정식 명칭이 「독점규제 및 공정거래에 관한 법률」인 ... -
[남재철의 기후&식량안보⑩] 기후가 휘두른 채찍, 복합재난에 대응해야 한다
▲ [남재철의 기후&식량안보] 기후가 휘두른 채찍, 복합재난에 대응해야 한다 [사진=남재철, Ai] 올여름 지구촌 곳곳에서 기후위기의 새로운 얼굴이 나타나고 있다. 유럽에서는 기록적인 폭염과 가뭄이 이어지면서 산불이 확산되고 있다. 그런데 한 지역에서 ... -
[서평] 탄소 규제 시대, 우리는 무엇을 준비하고 있는가?
▲ [서재익 박사 신간] 『더 약탈당하기 전에 읽어라』 [사진=남재철, 온프북스 & FN TODAY] 서재익 박사의 『더 약탈당하기 전에 읽어라』는 제목부터 상당히 도발적이다. ‘약탈’이라는 단어는 전쟁이나 식민지 시대를 떠올리게 하지만, 저자가 말하는 약탈은 총과 군함...
전체댓글 0
NEWS TOP 5
-
1[용석광의 컴플라이언스와 ESG] ㉑ 공정거래법의 주요 내용과 발전 과정: 13개 법률로 완성된 공정 경제의 인프라
-
2
[용석광의 컴플라이언스와 ESG] ㉒ 변화하는 시장과 진화하는 규제: 최근 공정거래법의 주요 이슈와 트렌드
-
3
[용석광의 컴플라이언스와 ESG] ㉓ 기업의 5대 이해관계자와 공정거래법: 상생과 신뢰의 네트워크 설계
-
4
[용석광의 컴플라이언스와 ESG] ㉔ 산업별 공정거래법 위반 TOP 8: 우리 업종의 급소는 어디인가
-
5
[용석광의 컴플라이언스와 ESG] ㉕ 공정거래 자율준수 프로그램(CP):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에서 '사전 예방'으로의 패러다임 전환
실시간뉴스
추천뉴스
사람들
more +-
오바마 “책은 세상을 보는 방식을 바꾼다”…인생 바꾼 6권 다시 읽는다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이 자신에게 깊은 영향을 준 책들을 다시 펼친다... -
UN 인권사무소, 말리 원주민 지도자 우무 디코 조명… “기후 정의와 원주민 권리 향상에 앞장”
유엔 인권사무소(UN Human Rights)가 7일 저녁 공식 X 계정을 통해 말리 출... -
방사능 연구에 바친 삶… 과학계의 거장 ‘마리 퀴리’를 기리며
과학 계정 ‘월드 오브 사이언스(World of Science)’가 7일 공식 X를 통해 19... -
스크린 넘어 세계를 보살피는 연기파 배우, ‘UN 평화대사’ 샤를리즈 테론(Charlize Theron)의 삶과 헌신
할리우드를 대표하는 연기파 배우이자 인도주의 운동가인 샤를리즈 테론(Cha...
오피니언
more +-
[남재철의 기후&식량안보⑪] 폭염의 시대, 가장 낮은 곳에 시원한 희망을 전하다
올여름도 기록적인 폭염이 이어지고 있다. 폭염은 단순히 불쾌한 더위... -
[용석광의 컴플라이언스와 ESG] ㉕ 공정거래 자율준수 프로그램(CP):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에서 '사전 예방'으로의 패러다임 전환
사고가 터진 후에야 대책을 마련하는 '사후 약방문' 식의 대응은 오랜 기간 ... -
[용석광의 컴플라이언스와 ESG] ㉔ 산업별 공정거래법 위반 TOP 8: 우리 업종의 급소는 어디인가
공정거래법은 대한민국 모든 기업에 적용되는 기본 규범이지만, 실제 현장... -
[남재철의 기후&식량안보⑩] 기후가 휘두른 채찍, 복합재난에 대응해야 한다
올여름 지구촌 곳곳에서 기후위기의 새로운 얼굴이 나타나고 있다. 유...
기획 / 탐방
more +-
제5회 한국ESG경영 최고위과정, 홋카이도서 ESG 탐방 프로그램 진행
제5회 한국ESG경영 최고위과정이 지난 14일부터 17일... -
[인공지능 문명 리포트 ⑥] 기계는 왜 거짓말을 할까
인공지능이 인간의 언어를 이해하고 대화하는 시대... -
[기계가 일하는 세상 ⑩] 24시간 멈추지 않는 무인 생산라인…공장은 잠들지 않는다
공장은 오랫동안 인간 노동의 상징이었다. 거대한 기계 소리, 반복되는 조립 ... -
[ESG탐방] 지속가능한 도시의 미래를 전시하다… 상하이 도시계획전시관이 보여주는 도시 운영의 방향
상하이 도시계획전시관(Shanghai Urban Planning Exhibition Center)은 상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