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극의 하얀 빙하에서 붉은 물이 흘러내리는 장면은 마치 얼음이 피를 흘리는 것처럼 보인다. 소셜미디어에서 반복적으로 화제가 되는 이곳은 남극 맥머도 드라이밸리(McMurdo Dry Valleys)의 테일러 빙하(Taylor Glacier) 끝자락에 있는 ‘블러드 폴스(Blood Falls)’이다.
Puppies & Positivity가 8월 15일 엑스(X)에 올린 게시물 역시 이 장면을 소개하면서 붉은 물의 원인을 빙하 아래 갇혀 있던 철분이 풍부한 염수로 설명했다. 이 설명의 핵심은 과학적으로 사실에 부합한다. 다만 최근 연구 결과를 종합하면 블러드 폴스는 단순히 ‘철분 때문에 붉게 보이는 폭포’를 넘어, 고대 해양환경과 빙하 아래 생태계의 흔적을 간직한 독특한 지질·생물학적 시스템으로 평가되고 있다.
붉은 물의 정체는 ‘피’가 아니라 철이 풍부한 염수
블러드 폴스의 붉은색은 피나 붉은색 조류 때문이 아니다. 테일러 빙하 아래에서 흘러나오는 고염도 염수(brine)에 철이 풍부하게 포함돼 있기 때문이다. 이 물이 빙하 밖으로 나오면서 공기와 접촉하면 철이 산화되고, 녹이 슨 것과 비슷한 철 산화물이 만들어지면서 강렬한 적갈색을 띠게 된다.
이 염수는 일반적인 빙하수가 아니다. 연구 결과 테일러 빙하 내부와 아래에는 상당한 규모의 염수 시스템이 존재하며, 이 물은 매우 낮은 온도에서도 얼지 않고 액체 상태로 존재할 수 있다. 2019년 지구물리학 연구 저널: 생물지구과학(Journal of Geophysical Research: Biogeosciences)에 발표된 연구에서는 빙하 내부의 염수를 직접 채취해 철과 염소, 황산염, 다양한 동위원소 등을 분석했다.
특히 2015년 네이처 커뮤니케이션즈(Nature Communications)에 발표된 연구에서는 전기비저항 탐사를 이용해 맥머도 드라이밸리 지하에 광범위한 염수 시스템이 존재할 가능성을 확인했다. 연구진은 테일러 빙하 아래의 염수가 블러드 폴스에서 지표로 드러나는 지하수 시스템의 일부라고 분석했다.
2026년 연구가 밝힌 새로운 단서…‘고대 바닷물’ 가능성
블러드 폴스 연구에서 가장 흥미로운 질문 가운데 하나는 ‘이렇게 짠 물이 어디에서 왔느냐’였다.
기존의 지구화학 연구는 염수의 화학적·동위원소적 특성을 바탕으로 해양 기원을 제시해 왔다. 과거 따뜻했던 시기에 바닷물이 테일러 계곡으로 들어왔고, 이후 해수면이 낮아지고 빙하가 전진하면서 일부 바닷물이 지하에 고립됐다는 가설이다.
그리고 2026년 8월 3일 국제학술지 네이처 지오사이언스(Nature Geoscience)에 발표된 연구는 여기에 새로운 생물학적 증거를 더했다.
안젤라 줌플리스(Angela Zoumplis) 연구진은 맥머도 드라이밸리와 해양 기준 지역에서 물·퇴적물·공기 등 167개 시료를 채취해 유전학적 분석을 실시했다. 그 결과 테일러 빙하 말단의 붉은 얼음과 진흙, 퇴적물에서 해양 환경과 연관성이 높은 미생물 진핵생물 군집이 뚜렷하게 확인됐다.
연구에서 확인된 해양성 생물군에는 규조류(diatoms), 착편모조류(haptophytes), 와편모조류(dinoflagellates), 섬모충류(ciliates) 등이 포함됐다. 연구진은 이 생물들의 유전적 특징을 분석한 결과 테일러 빙하 말단의 생물군이 주변 맥머도 드라이밸리의 일반적인 담수·육상 미생물 군집과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고 밝혔다.
특히 빙하 말단 지역에서 해양 시료와 공유되는 진핵생물의 비율은 9.34%로 나타난 반면, 주변 드라이밸리 지역에서는 1.15%에 그쳤다. 연구진은 이러한 차이가 단순한 우연이나 주변 환경에서의 일반적인 미생물 유입으로 설명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바람이 가져온 미생물이 아닐 가능성
이번 연구에서 중요한 부분은 ‘현재의 바람이 해양 미생물을 남극 내륙으로 가져온 것 아니냐’는 가능성을 검토했다는 점이다.
남극 드라이밸리는 강한 바람이 부는 지역이기 때문에 해양에서 발생한 미세한 생물학적 물질이 바람을 타고 이동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그러나 연구진은 테일러 빙하 말단에서 확인된 해양성 생물군의 특징과 주변 공기 시료 등을 비교한 결과, 현대의 바람에 의한 단순한 오염만으로 관찰된 패턴을 설명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이에 따라 연구진은 현재의 생물군이 과거 해양환경과 연결된 계통을 일부 보존하고 있을 가능성을 제시했다. 다만 이것이 곧바로 ‘수백만 년 동안 같은 미생물이 그대로 살아남았다’는 의미는 아니다. 연구가 보여주는 것은 현재의 생물군이 과거 해양환경과 연결된 생물학적 흔적을 갖고 있다는 것이며, 정확히 언제 바닷물이 고립됐고 그 이후 생물군이 어떤 변화를 거쳤는지는 추가 연구가 필요한 부분이다.
철과 황을 이용해 살아가는 지하 생태계
블러드 폴스가 과학적으로 더욱 특별한 이유는 극한 환경에서도 미생물 생태계가 유지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2007년 응용 및 환경 미생물학(Applied and Environmental Microbiology)에 발표된 연구에서는 블러드 폴스의 세균 군집을 분석한 결과 해양 미생물과 높은 유전적 유사성을 가진 세균들이 확인됐다. 연구진은 당시 분석된 세균의 상당 부분이 해양계통과 높은 유사성을 보였으며, 철과 황 화합물의 산화·환원 반응을 이용할 수 있는 미생물들이 존재한다고 보고했다.
이는 햇빛이 거의 도달하지 않는 빙하 아래에서도 생명이 유지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곳의 미생물들은 식물처럼 햇빛을 이용하는 대신 철과 황 등 무기물질이 관여하는 화학반응에서 얻는 에너지를 이용할 수 있다.
2015년 네이처 커뮤니케이션즈(Nature Communications) 연구에서도 블러드 폴스와 연결된 지하 염수에서 약 6만 개의 미생물 세포가 1㎖당 존재하는 것으로 추정됐으며, 지하 염수 환경이 단순한 물 저장 공간이 아니라 생물학적으로 활동적인 공간일 가능성이 제시됐다.
2019년 연구에서는 보다 정밀한 유전자 분석을 통해 기존에 확인되지 않았던 미생물 그룹도 발견됐다. 연구진은 테일러 빙하의 지하 염수에 독특한 미생물 군집이 존재하며, 그 구성과 분포가 빙하 아래의 수문학적 연결성과 밀접하게 연관돼 있을 가능성을 제시했다.
붉은 물은 어떻게 밖으로 나오는가
2026년에는 블러드 폴스의 또 다른 수수께끼에도 중요한 단서가 제시됐다.
남극 과학(Antarctic Science)에 2026년 1월 온라인 공개된 연구에서 연구진은 2018년 9월부터 10월 사이 테일러 빙하에서 GPS 관측자료, 블러드 폴스를 촬영한 타임랩스 카메라, 인근 보니호의 수온 자료를 동시에 분석했다. 세 종류의 관측이 우연히 같은 시기의 사건을 기록한 것이다.
그 결과 블러드 폴스에서 염수가 흘러나온 시기에 테일러 빙하 표면이 약 15㎜ 내려앉았고, 빙하의 이동 속도도 약 10%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동시에 보니호에서는 차가운 물이 유입된 흔적이 관측됐다.
연구진은 이를 빙하 아래에 축적된 수압과 염수 배출의 관계로 해석했다. 빙하 아래에서 압력이 높아지면 염수가 흐를 수 있는 경로가 열리고, 물이 빠져나가면서 지하 수압이 낮아져 빙하 표면이 일시적으로 내려앉고 이동 속도도 변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블러드 폴스는 단순히 ‘물이 새어 나오는 곳’이 아니라 빙하의 움직임과 지하수압, 호수의 수온 변화가 서로 연결된 복합적인 수문 시스템으로 볼 수 있다.
2026년 연구가 바꾼 블러드 폴스의 의미
블러드 폴스를 둘러싼 과학적 이해는 지난 수십 년 동안 크게 달라졌다.
처음에는 붉은색의 원인을 설명하는 것이 가장 큰 관심사였다. 이후 연구를 통해 붉은색은 철이 풍부한 염수가 공기와 접촉하면서 산화돼 나타나는 현상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다음에는 ‘그 염수가 어디에서 왔는가’가 중요한 질문이 됐다. 지구화학과 지구물리학 연구는 고대 해양 기원의 가능성을 제시했고, 2026년 네이처 지오사이언스(Nature Geoscience) 연구는 해양성 미생물 군집이라는 새로운 생물학적 증거를 추가했다.
동시에 2026년 남극 과학(Antarctic Science) 연구는 염수의 배출이 빙하 아래 압력과 실제 빙하 움직임의 변화와 연결돼 있음을 보여줬다.
결국 블러드 폴스는 고대 바다의 흔적, 빙하 아래의 액체 물, 극한 미생물 생태계, 현재 진행 중인 빙하의 수문학적 움직임이 한곳에서 만나는 자연 실험실에 가깝다.
화성·얼음 위성 연구에도 중요한 ‘지구의 실험실’
블러드 폴스 연구가 지구 밖 생명 탐사와도 연결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두꺼운 얼음 아래 액체 상태의 물이 존재하고, 햇빛이 부족하거나 없는 환경에서도 화학적 에너지를 이용하는 미생물이 살아갈 수 있다는 사실은 태양계의 얼음 위성이나 과거의 화성 환경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참고 사례가 된다.
실제로 연구진은 남극의 지하 환경을 태양계의 이른바 ‘오션 월드(Ocean World)’를 연구하기 위한 지구의 아날로그로 보고 있다. 얼음 아래 액체 물과 암석의 상호작용, 염분, 화학적 에너지가 결합하면 극한 환경에서도 생명체가 살아갈 수 있는 조건이 만들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엑스에 올라온 붉은 폭포의 사진은 시각적으로는 기묘한 자연현상처럼 보이지만, 그 아래에는 훨씬 복잡한 과학적 이야기가 존재한다.
블러드 폴스의 붉은 물은 피가 아니다. 그것은 철이 풍부한 고대 염수가 빙하 아래에서 밖으로 흘러나오면서 만들어낸 자연 현상이다. 그리고 2026년의 새로운 연구는 그 물속과 주변에 남아 있는 미생물의 흔적이 과거 남극의 해양환경과 연결돼 있을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다만 현재 연구만으로 염수가 정확히 언제 바닷물과 분리됐는지, 그 이후 미생물 군집이 어떤 진화 과정을 거쳤는지를 확정할 수는 없다. 연구진 역시 추가적인 연대 측정과 생물학적 분석이 필요하다고 보고 있다. 그럼에도 블러드 폴스는 남극의 얼음 아래에 과거의 환경 기록과 현재의 생명 활동이 동시에 보존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매우 드문 자연 연구 대상이라는 점에서 학술적 가치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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