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도원의 서가에 쌓인 것은 먼지가 아니라 위기였다. 천년의 역사를 간직한 장서들 사이에서 시작된 조용한 침략. 딱정벌레가 문화유산을 위협하고 있다.
헝가리 북서부의 언덕 위에 자리 잡은 파논할마 대수도원은 996년에 세워진 베네딕토회 수도원으로 오랜 세월 전쟁과 침략을 견디며 중부유럽 종교·문화의 심장으로 기능해왔다. 하지만 이번에는 눈에 보이지도 않던 새로운 적이 세계적 문화 유산을 위협하고 있다. 바로 기후 변화와 그로 인해 확산된 해충들이다. 그중에서도 특히 책을 갉아먹는 약국딱정벌레가 가장 큰 요인이다.
최근 수도원 도서관을 정기 청소 하던중 먼지처럼 보이는 가루 더미를 발견했다. 책등에는 구멍이 뚫려 있었고 책을 펼치자 딱정벌레가 남긴 터널이 나타났다. 전문가들의 조사 결과 딱정벌레가 수도원 장서 약 40만 권 중 최소 10만 권이 보관된 구역에 침입한 것으로 확인됐다. 도서관 측은 감염을 막기 위해 모든 책을 선반에서 꺼내 밀폐된 질소 환경에서 소독하고 있으며 손상된 책은 별도로 복원에 들어갈 예정이다.
복원 책임자 조피아 에디트 하이두는 외신과의 인터뷰에서 “이번처럼 심각한 감염은 처음”이라며, “기온 상승이 딱정벌레 번식을 부추겼을 가능성이 높다”고 밝혔다. 실제로 헝가리는 유럽 평균보다 더 빠른 기후 변화의 영향을 받고 있고 이러한 온난화가 해충의 활동 시기와 번식 주기를 늘려 문화재 보존에 새로운 위협을 가하고 있는 것이다.
기후 변화가 문화유산에 미치는 영향은 이제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 되고 있다. 유네스코 보고서(2022년)에 따르면 세계문화유산의 약 1/3이 홍수, 폭염, 생물학적 감염 등 기후 관련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고 밝혔다. 파논할마 사례는 이러한 위험이 추상적인 미래의 이야기가 아닌 현재 진행형이라는 점을 경고하고 있다.
도서관장 일로나 아스바니는 외신과의 인터뷰에서 “우리가 보관하는 책들은 단순한 종이가 아니라 헝가리와 유럽 역사의 일부이며, 딱정벌레에 갉아 먹힌 페이지는 곧 문화와 기억의 손실”이라고 말했다.
베네딕토회의 수도원 규칙에는 ‘모든 재산은 제단의 성스러운 그릇처럼 소중히 여겨져야 한다’는 구절이 있다. 파논할마 수도원은 이 고대의 규율을 따라 지금 이 순간에도 인류의 지적 유산을 구하기 위한 고군분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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