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Lee Su-ok's Spatial Resilience⑤] Three Faces of Architecture that Awaken the Senses, The Waterwindstone Museum
제주 바람은 거칠고, 그 바람 사이로 흐르는 물은 고요하다. 그 물 위에 무게를 지닌 돌이 놓이면, 공간은 말없이 균형을 이룬다. 재일동포 건축가 이타미 준은 세 가지 자연의 질료, '水(물)', '風(바람)', '石(돌)'로 제주를 빚어냈다. 그리고 그의 대표작인 수풍석(水風石) 미술관은 건축이 어떻게 기억과 감정을 지닌 살아있는 존재가 될 수 있는지를 증명한다.
흙과 돌, 바람의 언어를 읽어내는 건축가
이타미 준, 본명 유동룡. 그는 도쿄에서 태어나 일본에서 자랐지만, 내면의 뿌리를 언제나 제주와 한국의 땅에서 찾았다. '이타미'는 첫 해외여행에서 떠난 오사카 이타미공항에서, '준'은 절친했던 음악가 길옥윤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국적의 경계에 서 있던 그의 이름은 이미 '경계의 감각'을 내장한 채 태어났다.
이타미 준은 제주에서 만난 자연, 특히 바람과 물, 그리고 검은 현무암에서 고유의 건축언어를 찾았다. 자연에 저항하지 않고, 자연과 공생하는 건축을 꿈꿨다. 효율과 속도가 지배하는 현대건축에 비해, 그는 폐허가 되어도 가치를 지닐 수 있는 건축을 지향했다. 건축은 존재의 기록이자, 인간과 자연, 시간 사이의 윤리적 관계였다.
석(石), 무게와 침묵의 구조
관람의 시작은 석 미술관이다. 입구에 들어서기도 전에 시야를 압도하는 거대한 철판 매스가 먼저 말을 건다. 돌과 철이 엮어낸 외피는 무겁고 낯설며, 마치 침묵으로 세운 벽처럼 느껴진다. 산화된 철은 날씨에 따라 색을 달리하고, 돌은 온도에 따라 감정의 결을 바꾼다.
이곳은 전형적인 미술관과는 다르다.
무엇보다 빛을 대하는 방식이 그렇다. 인공조명 없이 오직 자연광만으로 공간을 구성하며, 빛이 들어오고 머무는 위치까지 철저히 계산되어 있다. 천창에서 수직으로 떨어지는 빛, 벽 사이로 스며드는 빛, 바닥에 남은 반사광까지… 각각이 장면이 되고 분위기가 된다. 그리고 그 장면은 매일 다르다. 흐린 날엔 회색빛이 감돌고, 여름 정오에는 날 선 그림자가 생기며, 겨울 저녁엔 붉은 기운이 공간을 물들인다. 기후를 그림 도구 삼아 스스로를 끊임없이 새로 그린다.
실내는 고요하다. 소리보다 침묵이 더 명확하게 인식되는 공간이다. 벽과 천장은 일정하지 않고, 복도는 불규칙한 리듬으로 이어지며, 그 리듬은 관람자의 걸음을 늦추고 멈추게 한다. 빛이 철판과 돌의 표면을 따라 흐를 때, 재료는 시간과 감정의 흔적을 동시에 담아낸다.
이곳엔 장식이 없다. 대신 공간 전체가 배경이자 무대가 되고, 관람자 자신이 장면의 일부가 된다. 건축은 드러나지 않게 공간을 조직하고, 관람자는 그 흐름에 자연스럽게 스며든다.
단지 전시를 위한 장소가 아니라, 빛과 물성, 감각과 시간이 겹쳐지는 다층적 풍경이다. 여기서의 기억은 전시보다, 공간을 따라 걸었던 ‘느림’과 ‘정적’의 감각으로 오래 남는다.
풍(風), 바람의 소리를 짓는 건축
두 번째 공간은 풍 미술관이다. 이곳은 눈보다 귀가 먼저 반응한다.
전체 구조는 적송 나무로 이루어져 있고, 그 사이사이 틈으로 바람이 스며든다. 단순한 통풍이 아니다. 바람은 이곳에 들어서는 순간, 음이 되고, 울림이 되고, 공간을 연주하는 소리가 된다. 건물의 외피는 굴곡진 곡선으로 설계되어 있다. 형태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악기처럼 작동한다. 바람은 나무 사이를 지나며 음계처럼 분절되고, 공간의 구조는 그 흐름을 모아 증폭시킨다. 공간 전체가 바람을 위한 공명실이 되는 셈이다.
관람자는 공간에서 ‘보는’ 것보다 ‘듣는’ 감각에 먼저 잠긴다. 억새가 부딪히는 사각거림, 적송 틈을 통과하는 휘파람 같은 소리, 새소리와 나뭇잎이 섞이는 바깥 풍경의 음악들. 이곳의 건축은 자연의 소리를 따로 연출하지 않고, 그대로 들이받아 정제 없이 내보낸다. 곡선 내부의 감싸진 공간은 마치 안쪽에서 바람을 품고 있는 커다란 악기 같다.
그 안에 서 있으면, 건축이 연주자가 되고, 사람은 악기의 내부 공명에 잠시 머무는 음표가 된다. 맞은편에 자리한 작은 건물 앞의 돌 위에 앉아 그 소리를 들으면, 마치 숲속의 음악회에서 혼자만의 좌석에 앉은 듯한 기분이 든다. 그 소리는 멀리서 들려오는 음악처럼 다가오다가, 어느 순간 귀 바로 옆에서 속삭이는 숨결이 된다. 봄엔 억새가, 여름엔 풍성한 녹음이, 가을엔 바스락거리는 단풍이, 겨울엔 차가운 적막이 이 건축의 연주자가 된다. 사계절의 소리는 언제나 같지 않고, 그때마다 공간의 결이 달라진다.
이곳은 바람을 구조화하고, 계절을 담아내며, 감각을 흔드는 건축이다.
공간과 자연, 신체 감각이 서로 교차하며 만들어내는 감응의 리듬 속에서, 관람자는 바람과 함께 머무르고, 바람과 함께 건축을 기억하게 된다.
수(水), 감각의 반사와 사유의 흐름
마지막 여정은 ‘수 미술관’이다.
입구에 들어서면 바닥보다 낮은 지형 속으로 발을 들인 듯하지만, 이상하게도 내부에선 마치 높은 곳에 떠 있는 듯한 감각이 든다. 그 모순은 곧 중심에 위치한 타원형 수면을 마주할 때 해소된다.
수면은 이 건축의 심장이다.
하늘과 구름, 바람과 빛을 담고, 다시 흘려보낸다. 낮에는 태양이, 밤에는 별빛이 물 위에 잠시 머물다 사라진다. 반사와 흡수, 응시와 파동 사이에서 공간은 정지된 듯 끊임없이 움직이고, 관람자와의 관계 역시 유동한다.
바닥과 벽은 제주 현무암으로 마감되어 있다. 깊고 거친 질감 위로 부서지는 빛과 물결은 감각을 조용히 자극한다. 촉각과 시각, 그리고 청각까지도. 발 아래 고요히 흐르는 물은 발소리마저 부드럽게 흡수하며, 침묵의 밀도를 높인다.
수면 위에 놓인 청동 오브제들은 정지된 조형물이 아니다. 시간에 따라, 계절에 따라 의미를 바꾸며 관람자의 내면으로 침잠해 들어간다. 그것들은 사유의 중심이자 명상의 시작점이며, 이 공간의 ‘무언의 언어’로 작동한다.
실내의 세심한 마감은 이 공간을 더욱 응축시킨다.
외부로는 움푹 들어간 듯 보이지만, 내부에 들어오면 천장이 열려 있고 빛이 높이서 떨어져 내린다. 벽돌 하나하나의 결, 청동 구조물의 표면에 맺힌 물방울까지, 작은 디테일들이 조용히 건축의 서사를 이끌고 감정을 조율한다.
공간 자체가 하나의 명상실이자 감각의 경계이며, 사유가 물결치듯 흘러가는 장소다. 바깥 세상의 소음을 차단하지 않아도 조용하고, 특별한 연출 없이도 깊다.
이곳에서의 체험은 시선보다는 감응에, 움직임보다는 정지에 가깝다.
관람자는 어느 순간 발걸음을 멈추고, 수면 위를 바라보다, 자신의 내면에 들어가게 된다. 물은 거울이 아니라, 사유의 파동을 되돌려주는 깊은 스크린이다.
수(水)는 리질리언스의 가장 조용한 형태다.
고요한 감정의 진폭이 번져나가고, 공간은 살아 있는 하나의 몸처럼 관람자에게 반응한다.
이곳을 나설 때, 관람자는 ‘무언가를 본 기억’이 아니라, 스스로를 되비춘 감각을 안고 걸어 나가게 된다.
비오토피아(BIOTOPIA), 감응하는 풍경의 집합체
비오토피아는 ‘생명(Bio)’과 ‘이상향(Utopia)’이 결합된 이름을 지닌 공간이다.
제주 중산간 해발 400미터 내외의 너른 대지 위에 펼쳐진 이곳은 약 200세대 규모의 주거 단지로 구성되어 있으며, 모든 건축은 건축가 이타미 준의 손끝에서 비롯되었다.
건물들은 하나같이 그가 사랑했던 산방산을 바라보도록 배치되어 있다.
그것은 풍경을 담기 위함이 아니라, 풍경과 함께 숨쉬기 위한 설계다. 이타미 준에게 건축은 자연을 프레임으로 가두는 틀이 아니라, 그 풍경 속으로 들어가는 ‘통로’였다.
그 철학은 ‘수풍석(水風石)’ 세 동의 미술관에서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다.
이 세 건축은 주거 단지의 외부에 따로 놓여 있지만, 여전히 비오토피아의 감각과 시간, 계절의 흐름과 긴밀히 공명한다.
물은 빛과 하늘을 반사하며 감정을 일렁이고, 바람은 나무 틈을 지나며 소리를 만들고, 돌은 질료의 무게로 중심을 잡는다.
이곳의 건축은 자연을 모방하지 않는다.
그 자체로 자연의 일부가 된다.
공간은 물처럼 흐르고, 바람처럼 흔들리며, 돌처럼 그 자리에 단단히 존재한다.
수풍석은 단지 전시를 위한 미술관이 아니다.
이곳은 사유의 장소이며, 감정의 파동을 담는 그릇이다. 건축은 기능을 넘어서 기억과 감정, 생명과 시간을 머무르게 하는 그릇이어야 한다는 그의 믿음은, 이 조용한 공간에 깊이 각인되어 있다.
이타미 준은 제주라는 땅에 가장 조용한 건축을 남겼다. 그 조용함은 바람을 품고, 그 정적은 물을 머금으며, 그 무게는 돌로 말하고 있다. 소리 없는 이 건축은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에게 묻는다.
우리는 자연과 어떻게 관계 맺을 것인가.
그리고 우리는 어떤 건축을 남기고 갈 것인가.
덧붙이는 글 | 이수옥(Lee Su Ok)
국민대학교 디자인대학원 실내설계 전공 석사과정에 재학 중이며, 학술연구의 일환으로 유휴 산업시설을 활용한 복합문화공간의 리질리언스 공간 특성에 대해 연구하고 있다. 특히 리질리언스 연구는 기존 산업유산을 단순히 보존의 대상으로 한정하지 않고 현대 도시 안에서 지속가능한 문화·사회적 기능을 수행할 수 있는 공간으로 재해석하여 도시재생과 공간 정의의 관점에서 의미 있는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또한 ㈜한국이러닝교육원에서 강사로 활동하며 디자인 및 공간 관련 교육 콘텐츠를 개발하고 있으며 한국 ESG위원회 인권전략위원장으로서 사회적 책임과 지속가능성을 중심으로 한 다양한 활동에 참여하고 있다. 현재 연구 분야로는 도시재생과 산업유산 재생, 문화유산의 활용 방안에 대해 보다 실제적이고 통합적인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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