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타바숨은 2005년 방글라데시에 자신의 건축사무소를 설립한 이후 대규모 도시 건축보다는 기후 변화와 재난에 직면한 지역 공동체를 위한 구조물들을 주로 설계해왔다. 그녀가 2023년에 선보인 ‘플랫팩 주택’은 홍수로 삶의 터전을 잃은 방글라데시 삼각주 지역 주민들을 위해 고안된 이동식 주거 공간이었다. 땅이 끊임없이 움직이는 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건축은 ‘영원히 고정된 형태’가 아닌 ‘환경에 맞춰 적응하는 존재’여야 한다는 것이 그녀의 신념이었다.
흐린 하늘과 이슬비 속에서도 런던의 켄싱턴 가든 한가운데 은은한 빛을 머금은 건축물이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고 있다. 올해로 25주년을 맞은 서펜타인 파빌리온(Serpentine Pavilion)은 방글라데시 출신 건축가 마리나 타바숨(Marina Tabassum) 이 설계한 작품으로, 제목은 「A Capsule in Time」, 즉 ‘시간 속의 캡슐’이다. 이 작품은 일시적인 구조물이라는 파빌리온의 본질 속에 ‘현재에 존재하는 건축’이라는 타바숨의 철학을 담고 있다.
타바숨은 2005년 방글라데시에 자신의 건축사무소를 설립한 이후 대규모 도시 건축보다는 기후 변화와 재난에 직면한 지역 공동체를 위한 구조물들을 주로 설계해왔다. 그녀가 2023년에 선보인 ‘플랫팩 주택’은 홍수로 삶의 터전을 잃은 방글라데시 삼각주 지역 주민들을 위해 고안된 이동식 주거 공간이었다. 땅이 끊임없이 움직이는 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건축은 ‘영원히 고정된 형태’가 아닌 ‘환경에 맞춰 적응하는 존재’여야 한다는 것이 그녀의 신념이었다. 이러한 생각은 이번 서펜타인 파빌리온에서도 그대로 이어진다.
시간 속의 캡슐(A Capsule in Time)은 나무로만 구성된 네 개의 곡선형 캡슐 구조가 서로 얽혀 만들어진 형태로 중앙에는 은행나무 한 그루가 자리를 잡고 있다. 은행나무는 혹독한 온도 차를 견디는 생명력의 상징으로 타바숨은 이 나무를 “공간의 심장이자 영혼”이라고 부른다. 반투명한 꿀빛 패널을 통과한 빛은 내부로 들어와 부드러운 그림자를 드리우며 런던의 잿빛 하늘 아래에서도 따스한 기운을 느끼게 한다. 그녀는 “맑은 날엔 빛이 밝게 들어오고 흐린 날에는 그 부드러움이 더 잘 드러난다”며 “빛이 공간의 감정을 결정한다”고 말했다.
이번 파빌리온은 일시적 구조물이라는 점에서 타바숨의 건축적 언어와 잘 맞닿아 있다. 그녀에게 ‘무상함’은 단지 덧없음이 아니라 ‘지속 불가능한 환경 속에서 건축이 존재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한 근본적 질문이기도 하다. 켄싱턴 가든의 한가운데에 세워진 이 구조물은 여름 동안 사람들에게 쉼터이자 대화의 공간이 되지만 가을이 오면 해체되어 또 다른 땅으로 옮겨간다. 타바숨은 “건축이 영원할 필요는 없다. 중요한 건 지금 이 순간, 이 공간이 사람들에게 어떤 경험을 주는가”라고 말한다.
파빌리온의 내부는 단순한 조형미를 넘어 ‘열린 도서관’ 혹은 ‘대화의 장’처럼 설계되었다. 내부 벽면에는 책장이 설치되어 있어 방문객들이 책을 읽거나 담소를 나누는 동안 빛과 그림자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천천히 움직인다. 공간은 공원과 자연스럽게 이어지며 경계가 사라진 듯한 개방감을 준다.
서펜타인 갤러리는 2000년 자하 하디드(Zaha Hadid)의 첫 번째 파빌리온으로 시작된 이후 매년 세계의 건축가들에게 이 프로젝트를 통해 영국에서의 첫 건축 기회를 제공해왔다. 렘 콜하스, 프랭크 게리, 프리다 에스코베도, 리나 고트메 등 수많은 이름들이 이 프로젝트를 거쳐 갔고 그중 일부는 프리츠커상 수상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올해의 주인공 마리나 타바숨 역시 방글라데시의 기후 현실을 건축의 언어로 번역해 세계 무대에 등장한 인물로 그녀의 참여는 ‘건축의 사회적 책임’을 다시금 환기시키는 사건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번 파빌리온의 또 다른 특징은 ‘가벼움’이다. 모든 구조물이 현장에서 쉽게 조립되고 해체될 수 있도록 설계되었으며, 일부는 공장에서 사전 제작되어 운송 효율성과 지속가능성을 높였다. 방화 규정으로 인해 주트 천 대신 폴리카보네이트 패널을 사용했지만 반투명한 질감이 오히려 빛의 효과를 극대화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타바숨은 “재료의 변화도 결국 장소와 환경이 결정하는 것”이라며 “건축은 완성보다 과정에 가깝다”고 설명했다.
평론가들은 이번 파빌리온을 두고 “빛과 시간, 자연의 관계를 시적으로 표현한 공간”이라고 평했다. 런던의 흐린 날씨 아래에서도 따스한 황금빛을 품은 이 건물은 건축이 반드시 영구적일 필요는 없다는 사실을 다시 일깨운다. 네 개의 나무 캡슐과 한 그루의 은행나무가 함께 만들어내는 이 공간은 바람과 빛 그리고 사람들의 존재를 담아내며 ‘현재의 건축’이란 무엇인가를 묻는다.
전시가 끝난 뒤 이 구조물은 또 다른 땅으로 옮겨져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될 것이다. 타바숨은 “언젠가 햇살이 따뜻하고 맑은 곳으로 옮겨져, 그곳에서도 빛을 머금은 공간으로 남길 바란다”고 말했다. “그곳에 들어서는 순간, 마치 시간이 잠시 멈춘 듯한 평온함을 느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처럼 시간 속의 캡슐(A Capsule in Time)은 단순히 하나의 여름 전시 건축물이 아니라 ‘변화 속에서 존재하는 건축’이라는 타바숨의 철학적 응답이자 서펜타인 파빌리온이 25년간 이어온 실험적 전통의 새로운 장을 여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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