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빌바오 구겐하임과 디즈니 콘서트홀로 도시의 의미를 다시 쓴 혁신가
세계 건축계를 대표하는 거장이자 ‘스타건축가(starchitect)’라는 단어를 대중화한 프랭크 게리(Frank Gehry)가 9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게리는 12월 5일(현지시간) 캘리포니아 산타모니카 자택에서 짧은 호흡기 질환을 앓은 뒤 영면했다고 그의 사무소인 게리 파트너스(Gehry Partners)가 공식 확인했다.
1929년 캐나다 토론토에서 태어난 게리는 본명 프랭크 오언 골드버그(Frank Owen Goldberg)였다. 1947년 가족과 함께 로스앤젤레스에 정착한 그는 USC에서 건축을 공부한 뒤 하버드대에서 도시계획을 연구하며 설계 철학을 넓혀갔다. 당시 로스앤젤레스의 거칠고 자유로운 도시 풍경은 그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고, 훗날 그의 건축 세계 전반에 “일상의 재료와 도시의 에너지”라는 특징으로 녹아들었다.
게리의 이름을 세계에 각인시킨 작품은 단연 1997년 개관한 스페인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이다. 티타늄 패널로 감싼 유려한 곡선의 외관은 개관 직후부터 전 세계 언론과 관광객의 주목을 받았고, 쇠퇴하던 공업 도시 빌바오를 국제 문화도시로 탈바꿈시켰다. 이른바 ‘빌바오 효과(Bilbao Effect)’는 건축이 도시 경제와 이미지에 미칠 수 있는 영향력을 상징하는 용어로 남았고, 이후 수많은 도시가 ‘두 번째 빌바오’를 꿈꾸며 게리에게 러브콜을 보냈다.
로스앤젤레스는 오랫동안 게리의 고향이자 실험의 장이었지만 정작 그를 대형 공공 프로젝트에 기용하는 데에는 시간이 걸렸다. 그 흐름을 바꾼 결정적 계기가 월트 디즈니 콘서트홀(2003)이었다. 빌바오보다 먼저 설계되었지만, 여러 차례의 예산 문제와 공사 중단을 겪으며 뒤늦게 완공된 디즈니 콘서트홀은 반짝이는 스테인리스 스틸 곡면 외관과 탁월한 음향을 갖춘 공연장 내부로 호평을 받았다. 게리가 “조각적 건축만 한다”는 지적을 반박하듯 실용과 예술을 모두 충족한 걸작으로 자리 잡았다.
프랑스 파리의 루이비통 재단 미술관(2014), 베를린의 피에르 불레즈홀(2017) 등 게리의 후기 작품 또한 더욱 정교해진 곡선미와 도시 맥락에 대한 깊은 배려로 평가받았다. 특히 그는 기존 건물을 재해석하는 데에도 뛰어난 감각을 보였으며, 최근까지도 로스앤젤레스의 오래된 은행 건물을 청소년 오케스트라 공연장(YOLA)으로 탈바꿈시키는 등 활발한 활동을 이어왔다.
게리는 1989년 ‘건축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프리츠커상(Pritzker Architecture Prize)을 수상했다. 심사위원단은 그의 작업을 “미국적 감수성과 실험정신이 결합된 독창적 건축”이라 평가했다. 일부 비평가들은 그의 작품이 ‘형태 과잉’ 또는 ‘비용 대비 효용 부족’이라는 지적을 하기도 했지만, 도시와 문화에 실질적 변화를 일으킨 빌바오 구겐하임의 성공은 그러한 비판을 무색하게 만들었다.
프랭크 게리는 말년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건축을 “인간적 스케일을 잃지 않으려는 노력”이라고 강조했다. 그의 유려한 곡선과 금속의 반짝임 뒤에는 빛과 그림자, 비례, 공간감 등 기본기에 대한 수십 년의 집요한 탐구가 있었다.
게리는 아내 버르타 아길레라, 네 명의 자녀, 그리고 여동생을 남기고 눈을 감았다. 그러나 빌바오의 강가에서, 로스앤젤레스의 번화한 도심에서, 파리의 숲 속에서 그의 건축은 여전히 살아 있으며 앞으로도 도시의 기억 속에서 오랫동안 빛날 것이다.
그는 건물을 설계한 것이 아니라 도시가 느끼는 감각 자체를 바꾸어 놓은 예술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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