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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상흔 위에 소환된 잊혀진 지식... 안젤름 키퍼, 밀라노에서 여성 연금술사를 기리다

  • 권민정 기자
  • 입력 2026.02.10 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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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젤름 키퍼, 밀라노에서 여성 연금술사를 기리다. [사진=Anselm Kiefer]

 

2026년 이탈리아 밀라노에서는 겨울올림픽을 앞두고 스포츠를 넘어선 문화적 성찰의 장이 펼쳐지고 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독일 현대미술 거장 안젤름 키퍼가 선보인 대규모 전시 ‘여성 연금술사들(Le Alchimiste)’이다. 이번 전시는 2026 밀라노·코르티나담페초 동계올림픽 공식 문화 프로그램의 하나로 기획되었으며, 밀라노 중심부에 위치한 팔라초 레알레의 역사적 공간에서 개최돼 예술과 역사 그리고 기억이 교차하는 경험을 제공한다.


전시가 열리는 팔라초 레알레의 ‘카리아티드의 홀(Sala delle Cariatidi)’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폭격으로 크게 파괴된 장소다. 천장과 벽면의 훼손 흔적, 반쯤 부서진 여성 형상의 기둥 조각들은 전쟁이 남긴 상처를 지금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다. 키퍼는 이 공간이 지닌 역사적 무게와 파괴의 흔적을 작품의 중요한 일부로 받아들이며 과거의 기억 위에 새로운 서사를 쌓아 올렸다.


키퍼가 이번 전시에서 주목한 대상은 역사 속에서 상대적으로 주목받지 못했던 여성 연금술사와 초기 과학자들이다. 그는 연금술과 자연 철학 그리고 치유와 지식의 탐구에 기여했으나 남성 중심의 역사 서술 속에서 잊혀졌던 여성 인물 38명을 대형 회화 작품으로 소환한다. 높이 약 6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캔버스들은 관람객을 압도하며 여성 연금술사들의 이름과 상징적 이미지, 자연과 우주의 요소들을 중첩시켜 표현한다. 이를 통해 키퍼는 연금술을 단순한 신비주의가 아니라 지식과 변화의 은유로 확장한다.


전시의 공간 구성 또한 특징적이다. 작품들은 벽면이 아닌 바닥에 독립적으로 세워져 지그재그 형태로 배치되며, 관람객은 작품 사이를 걸으며 자연스럽게 이동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거울과 반사 요소, 폐허로 남은 건축적 흔적이 작품과 어우러져 ‘드러난 것과 숨겨진 것’, ‘기억과 현재’가 끊임없이 교차하는 장면을 만들어낸다. 이는 물질과 시간 그리고 인간의 기억을 주요 주제로 삼아온 키퍼의 작업 세계와도 맞닿아 있다.


작가는 이번 전시에 대해 특정한 이념이나 메시지를 직접적으로 주장하기보다는 역사 속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음에도 충분히 인식되지 못했던 인물들을 다시 바라보는 계기를 만들고자 했다고 밝힌다. 큐레이터 역시 이 전시를 권리나 선언의 문제가 아니라, 지식의 역사에서 여성의 존재를 재발견하는 행위로 설명한다.


‘여성 연금술사들(Le Alchimiste)’ 전시는 2026년 2월부터 9월까지 이어지며 밀라노를 찾는 관람객들에게 전쟁의 상처가 남은 공간에서 예술을 통해 기억과 치유, 역사적 재해석을 경험할 기회를 제공한다. 이번 전시는 동계올림픽이라는 세계적 행사와 맞물려 스포츠 축제 이면에서 문화와 예술이 수행할 수 있는 역할을 다시 한 번 환기시키는 사례로 평가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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