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 2000년 전 베수비오 화산 폭발로 불에 타 숯처럼 변한 고대 파피루스 두루마리가 인공지능(AI) 기술을 통해 다시 세상과 만났다. 오랫동안 누구도 펼칠 수 없었던 고대 문헌의 내용을 손상 없이 읽어내는 데 성공하면서, AI가 문화유산 연구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국제 연구진은 지난 25일(현지시간) 이탈리아 나폴리에서 열린 학술회의에서 헤르쿨라네움(Herculaneum)에서 발견된 파피루스 두루마리 'PHerc.1667'을 가상으로 완전히 펼쳐 약 1.5m에 이르는 그리스어 원문을 복원하는 데 성공했다고 발표했다. 이번 연구는 '베수비오 챌린지(Vesuvius Challenge)' 프로젝트의 성과로, 연구 결과와 데이터는 함께 공개됐다.
헤르쿨라네움은 서기 79년 베수비오 화산 폭발 당시 폼페이와 함께 화산재와 화쇄류에 묻힌 고대 로마 도시다. 당시 도서관에 보관돼 있던 수백 권의 파피루스 두루마리는 뜨거운 열에 탄화됐지만 산소가 차단된 상태에서 보존되면서 오늘날까지 형태를 유지해 왔다.
하지만 탄화된 두루마리는 조금만 힘을 가해도 부서질 정도로 약해 실제로 펼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했다. 18세기 발견 이후 다양한 복원 방법이 시도됐지만 대부분 문서를 훼손하거나 파괴하는 결과로 이어졌고, 오랫동안 그 안에 어떤 내용이 담겨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연구진은 이번 연구에서 고해상도 CT 촬영으로 두루마리 내부를 정밀하게 스캔한 뒤, 컴퓨터 비전과 머신러닝 기술을 활용해 말려 있는 파피루스를 가상으로 펼쳤다. 이후 AI가 종이 섬유와 먹의 미세한 차이를 분석해 육안으로는 식별하기 어려운 글자를 복원하면서 문헌을 읽어낼 수 있었다.
이번에 해독된 문헌은 인간의 본성과 윤리, 예술, 행동에 관한 철학적 내용을 담고 있는 것으로 분석됐다. 연구진은 글의 표현 방식과 내용 등을 종합해 스토아 철학의 사상을 반영한 작품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고 있다. 특히 마지막 부분에서는 스토아 철학자 크리시포스의 제자이자 조카인 아리스토크레온의 이름이 확인돼 문헌의 성격을 밝히는 중요한 단서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연구진은 또 다른 두루마리인 'PHerc.139'에서도 새로운 사실을 확인했다. 그리스 철학자 필로데모스의 저서 '신들에 관하여(On Gods)' 제8권이라는 제목을 읽어내면서, 지금까지 제1권만 알려졌던 이 저작이 최소 8권 이상으로 구성됐다는 사실이 처음 밝혀졌다.
프로젝트를 이끌고 있는 미국 켄터키대학교 브렌트 실스 교수는 "약 2000년 동안 이 문서들은 형태는 남아 있었지만 누구도 내용을 읽을 수 없었다"며 "첨단 영상 기술과 AI의 발전으로 마침내 잃어버린 고대의 목소리를 다시 들을 수 있게 됐다"고 의미를 설명했다.
현재 연구팀은 약 45개의 두루마리를 디지털 방식으로 분석했으며, 앞으로도 600개 이상 남아 있는 미개봉 두루마리의 해독을 이어갈 계획이다.
이번 연구는 단순히 오래된 문헌 한 권을 읽어낸 성과를 넘어선다. 유물을 손상시키지 않고 내부 내용을 복원하는 AI 기술이 문화유산 보존과 고고학 연구의 새로운 방법으로 자리 잡을 가능성을 보여줬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연구진은 앞으로 이 기술이 화재나 재난으로 훼손된 문헌은 물론 사해문서와 같은 다른 고대 기록물 연구에도 폭넓게 활용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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