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아메리카의 안데스 산맥은 장엄한 자연경관뿐 아니라 수백만 명의 생명을 지탱하는 보이지 않는 생태 인프라를 품고 있다. 바로 ‘파라모(Parámo)’라 불리는 고산 생태계다. 해발 3,500m에서 5,000m 사이의 수목한계선 위와 만년설선 아래에 자리한 이 지역은 단순한 고산 초원이 아니라 물을 저장하고 정화하는 ‘지구의 천연 저수지’로 불린다.
파라모는 비, 안개, 빙하의 녹은 물을 흡수해 토양 속에 머금은 뒤 천천히 하류로 흘려보내는 구조를 갖고 있다. 그 결과, 저지대 도시와 농촌 지역의 수자원이 안정적으로 공급된다. 미국 자연보전협회(Nature Conservancy)는 파라모가 안데스 전역에서 약 8,500만 명 이상에게 물을 공급한다고 분석했다. 특히 파라모의 대표 식생인 ‘프라이레혼(frailejones)’은 수분을 머금는 스펀지 같은 역할을 하며, 이 생태계가 ‘물공장’으로 불리는 이유를 보여준다.
그러나 이 소중한 고산 습지대가 심각한 위협에 직면해 있다. 기후변화로 인한 온도 상승과 강수량 감소는 파라모의 토양이 물을 저장하는 능력을 약화시키고 있다. 가디언(The Guardian)에 따르면 “콜롬비아의 빙하가 사라지며 도시들이 미래의 물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고 경고했다. 실제로 최근 몇 년간 강우 패턴의 불안정으로 인해 파라모 지역의 수분 순환이 불균형해지고 가뭄과 홍수가 교차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여기에 인간 활동의 압박도 크다. 감자와 옥수수 재배를 위한 농지 확장과 과도한 가축 방목, 광산 개발, 불법 벌목 등이 파라모의 식생과 토양 구조를 파괴하고 있다. 토양이 단단히 압축되면 빗물이 스며들지 못해 침식이 가속화되고 결국 하류의 물 공급이 불안정해진다. 로이터(Reuters)에 따르면 “에콰도르와 콜롬비아의 주요 파라모 습지가 가뭄 속에서 생태적 한계에 다다르고 있다”고 보도했다.
콜롬비아와 페루 등 안데스 여러 나라에서는 이러한 위기를 막기 위한 지역 보전 움직임이 확산되고 있다. 페루 북부 카하마르카(Cajamarca) 주에서는 ‘파라모스와 산림 보호구역(Área de Conservación Regional Páramos y Bosques Montanos de Jaén y Tabaconas)’이 새로 지정되어 3만 헥타르 이상의 파라모가 보호받고 있다. 이곳은 약 7,000여 명의 주민에게 깨끗한 물을 공급하며 250종이 넘는 조류가 서식하는 생물 다양성의 보고다.
콜롬비아에서는 여성과 원주민 공동체가 파라모 보호의 핵심 주체로 나서고 있다. 그들은 농업과 생계 활동 속에서도 지속 가능한 방식으로 토양을 관리하고 전통적 식물 지식을 기반으로 생태계 복원 프로젝트를 이어간다. 유엔개발계획(UNDP)은 이들을 “안데스의 물 사원 수호자”라 부르며 지역의 자생적 기후 대응 모델로 평가했다.
전문가들은 파라모의 보전이 단순한 환경문제가 아니라 물 안보, 식량, 생계, 인권의 문제라고 입을 모은다. 파라모의 수문학적 기능이 약화되면 하류 도시의 물 부족이 현실화되고 농업과 전력 생산까지 연쇄적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기후학자들은 이 생태계가 지닌 의미를 “지구의 가장 효율적인 자연 인프라”로 표현한다. 물을 저장하고, 탄소를 가두며, 생명을 유지하는 시스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기능이 인간의 무분별한 토지 이용과 기후변화 속도에 의해 빠르게 무너지고 있다.
“파라모를 돌본다는 것은 인간의 삶을 지키는 일이다.”
이 말은 안데스의 고산 마을 사람들에게는 일상의 진실이자 전 세계가 귀 기울여야 할 경고이기도 하다.
물은 생명이며, 파라모는 그 생명의 근원이다. 지금 우리가 파라모를 지키는 일은 결국 우리 자신의 미래를 지키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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