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의 남부 데칸고원 지역에는 한때 사회의 가장 밑바닥으로 불리던 ‘불가촉천민(Dalit)’ 여성들이 있다. 이들은 오랫동안 인도 사회의 카스트 구조 속에서 배제되고 교육과 경제적 기회로부터 철저히 소외되어 왔다.
특히 달리트 여성들은 ‘여성’이자 ‘하위 카스트’ 그리고 ‘빈곤층’이라는 삼중의 차별 속에서 살아가며 사회적 폭력과 억압에 직면해왔다. 그러나 지난 수십 년 동안 이들이 보여준 변화는 놀라울 정도로 혁신적이다. 바로 ‘기후 스마트 농업(climate-smart agriculture)’을 통해 스스로의 삶과 공동체 그리고 지역의 환경을 바꿔낸 것이다.
이 변화의 중심에는 데칸 개발 협회(Deccan Development Society, 이하 DDS)가 있다. 1983년에 설립된 DDS는 인도 남부 텔랑가나 주의 자히라바드(Zaheerabad)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풀뿌리 단체로 약 5,000명의 달리트 및 토착 여성 농부들과 함께 일하고 있다. 이들은 ‘상함(Sangham)’이라 불리는 여성 자조 모임을 구성해 농업, 식량, 건강, 시장, 미디어 등 여러 분야에서 공동체의 자립을 도모하고 있다.
데칸 개발 협회(DDS)의 활동 무대인 데칸고원은 강우량이 적고 토양이 척박한 건조지역으로, 농업이 매우 어려운 곳이다. 여기에 인도 전역에 확산된 ‘녹색혁명(Green Revolution)’ 이후 관개시설과 살충제에 의존한 단일작물 중심의 농업이 도입되면서 문제는 더욱 심각해졌다.
밀, 쌀, 면화 같은 환금작물 재배는 토양을 고갈시키고 생태계를 훼손했으며 농민들은 부채와 흉작에 시달렸다. 실제로 매년 수천 명의 인도 농민이 경제적 절망 속에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현실이 계속되고 있었다.
이러한 위기 속에서 달리트 여성 농부들은 기장(millet)이라는 전통 곡물에 주목했다. 기장은 인도 남부의 토착 작물로 가뭄과 홍수, 해충에 강하고 비옥하지 않은 토양에서도 자라난다.
여성 농부들은 데칸 개발 협회(DDS)의 지원 아래 씨앗을 보존하고 재배를 확대하며 지역 고유의 농업 생태계를 되살려 나갔다. 그 과정에서 데칸 개발 협회(DDS)는 여성들이 자율적으로 운영하는 종자 은행(seed bank), 기장 가공 시설, 여성 주도 시장과 식당을 설립하도록 도왔다. 단순히 작물을 재배하는 데 그치지 않고 생산–가공–판매까지의 가치사슬을 여성들의 손으로 직접 구축한 것이다.
이러한 모델은 단지 농업기술의 변화에 그치지 않는다. 달리트 여성들은 ‘자급(self-sufficiency)’과 ‘공동체 회복력(resilience)’을 회복했다. 팬데믹 기간에도 이 지역 여성 농부들의 농장은 안정적인 수확을 유지했으며 외부 시장이나 공급망에 의존하지 않아도 식량을 확보할 수 있었다. 반면 인근 지역의 단일작물 농가들은 불규칙한 강우와 시장 붕괴로 큰 피해를 입었다. 이는 다양성과 생태적 균형에 기반한 농업이 얼마나 강한 회복력을 지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가 되었다.
DDS의 여성들은 또한 커뮤니티 라디오와 영화 제작을 통해 토착 곡물의 가치와 화학 비료의 위험성을 주민들에게 알렸다. 나아가 인도 정부를 상대로 정책 변화를 요구해 결국 2013년 ‘국가 식량 안보법(National Food Security Act)’에 기장을 포함시키는 성과를 거두었다. 이들은 세계 각지의 환경단체와 정부 관계자들에게 지속 가능한 농업의 모범 사례로 소개되며 국제적인 주목을 받았다.
현재 60개 이상의 마을에는 전통 작물의 씨앗을 보존하는 종자 은행이 운영되고 있고 50여 종의 기장·잡곡 품종이 재배되고 있다. 약 5,000명 이상의 달리트 여성들이 이 운동에 참여하며 그 결과 지역의 영양 상태가 개선되고 여성들의 소득과 자존감이 눈에 띄게 높아졌다. 더 나아가 이들 중 일부는 마을 의회에서 선출직으로 활동하며 공동체의 의사결정 과정에 참여하는 리더로 자리 잡았다.
이 사례의 의미는 단순히 한 지역의 성공적 농업 모델을 넘어선다. 달리트 여성들의 기장 농업은 식량 안보, 성평등, 기후 대응, 생물 다양성 보전이라는 네 가지 지속가능발전목표(SDGs)를 동시에 실천한 모델로 평가된다.
불평등 구조 속에서도 공동체의 지식과 연대를 바탕으로 경제적 자립과 생태적 전환을 이뤄낸 이들의 이야기는 기후 위기 시대에 지역 공동체가 어떻게 스스로의 미래를 바꿀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강력한 사례다.
오늘날 인도 전역에서 유기농업과 지속 가능한 소비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가운데 달리트 여성들은 더 이상 사회의 변두리에 머물러 있지 않다. 그들은 정책 논의의 주체로서 자리 잡고 있으며 전통과 혁신이 공존하는 새로운 농업 패러다임을 제시하고 있다. 한때 ‘불가촉천민’이라 불리던 이들이 이제는 세계가 주목하는 ‘기후 스마트 농부’로서 지속가능한 미래의 주인공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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