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을 앞두고 열린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연례 마라톤 기자회견은 올해도 러시아 정치의 축소판 같은 모습으로 진행됐다. 몇 시간에 걸쳐 이어진 행사에서 푸틴은 국제 질서와 전쟁 그리고 외교 문제를 거침없이 언급하는 한편, 지방 도로 사정이나 지역 행정과 같은 사소한 민원성 질문에도 답하며 ‘국가 지도자’와 ‘지역 책임자’의 역할을 동시에 수행하는 모습을 연출했다.
그러나 올해 기자회견의 중심에는 무엇보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자리하고 있었다. 행사는 유럽연합이 우크라이나에 약 1,050억 달러 규모의 무이자 대출을 제공하기로 결정한 직후 열렸고, 이는 전쟁이 4년 차로 접어든 시점에서 우크라이나에 시간과 무기를 동시에 제공하는 조치로 평가됐다. 푸틴은 이러한 서방의 지원을 강하게 의식한 듯 전쟁에 대해 예년보다 훨씬 직설적인 어조를 유지했다.
푸틴은 러시아군이 “전선 전체를 가로질러 진격하고 있다”며, 러시아가 완전 혹은 부분적으로 장악했다고 주장하는 도시와 마을의 이름을 하나하나 열거했다. 러시아 국영 언론과 친정부 매체들 역시 이 발언을 집중적으로 인용하며, 전황이 러시아에 유리하게 흘러가고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러한 보도는 군사적 성과를 부각함과 동시에 장기화되는 전쟁에 대한 국내 피로감을 관리하려는 의도가 담긴 것으로 해석된다.
반면 푸틴은 전쟁으로 인한 막대한 인명 피해에 대한 책임은 철저히 부인했다. 그는 “러시아는 이 전쟁을 시작하지 않았다”는 기존의 주장을 되풀이하며, 모든 책임을 우크라이나와 서방에 돌렸다. 동시에 그는 협상을 통한 전쟁 종식 가능성도 언급했다. 다만 그가 말한 ‘평화’는 명확한 전제 조건을 동반했다.
푸틴은 러시아가 “이번 위기를 초래한 근본 원인을 해결하는 것을 전제로 평화적 종식을 준비할 의지가 있다”고 밝혔는데, 이 ‘근본 원인’이라는 표현은 2022년 전면 침공 직전 러시아가 요구했던 조건들을 사실상 그대로 의미한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우크라이나의 돈바스 지역 철수, 나토의 추가 확장 중단, 그리고 키이우 정권 교체에 준하는 요구가 그 핵심이다.
푸틴은 냉전 종식 이후 나토가 동쪽으로 확장해 온 과정에 대한 오랜 불만도 다시 꺼내 들었다. 그는 BBC 기자의 질문에 답하며 “러시아가 존중받았다면 ‘특별 군사 작전’은 필요 없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서방 언론들은 이러한 주장에 대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오히려 핀란드와 스웨덴의 나토 가입을 촉발해 북유럽에서 나토의 확장을 가속화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러시아 언론들은 이번 기자회견을 두고 푸틴의 ‘레드라인’이 여전히 확고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미국에서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가 비전통적인 외교 채널을 통해 전쟁 종식을 시도하고 있음에도 러시아의 기본 입장은 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실제로 트럼프 대통령의 특사 스티브 위트코프가 러시아 국부펀드 총재이자 푸틴의 핵심 측근인 키릴 드미트리예프와 만나 종전 방안을 논의한 사실이 전해졌지만 푸틴은 협상의 문을 열어두면서도 조건을 낮추지는 않았다.
푸틴은 트럼프 대통령의 중재 노력에 대해서는 공개적으로 긍정적인 평가를 내놓았다. 그는 트럼프가 “분쟁을 끝내기 위해 진지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고 말하며, 미국의 역할을 일정 부분 인정하는 발언을 했다. 하지만 러시아가 실제로 어느 정도까지 양보할 의지가 있는지는 여전히 불투명하다.
결국 이번 연말 기자회견은 러시아가 전쟁에서 주도권을 쥐고 있다는 메시지를 국내외에 반복적으로 주입하는 자리였다는 평가가 나온다. 평화에 대한 언급은 있었지만, 그것은 러시아가 설정한 조건을 전제로 한 것이었고 우크라이나와 서방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요구들이 여전히 협상의 출발선에 놓여 있다. 푸틴이 전쟁을 끝내고자 하는 진심을 가지고 있는지 아니면 시간을 벌기 위한 정치적 수사에 그치는지는 앞으로의 전황과 외교 움직임 속에서 드러날 것으로 보인다.
BEST 뉴스
-
국민 10명 중 4명 토지 보유… 개인 토지소유자 2012만 명
▲ 기사의 이해를 돕기 위한 이미지. [사진=gemini 생성이미지] 우리나라 국민 가운데 약 40%가 토지를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전체 개인 토지소유자는 2000만 명을 넘어섰으며, 토지 보유 면적은 60대 이상 고령층에 집중된 것으로 조사됐다. 국토교통부는 2025년 말 ... -
문체부, '2026 아이치-나고야 아시안게임·패러게임' 준비단 출범…선수단 안전·편의 지원 본격화
▲ 2026 아이치-나고야 아시안게임 공식 로고 [사진= 2026 아이치-나고야 아시안게임] 문화체육관광부가 오는 9월 개막하는 2026 아이치-나고야 아시안게임과 아시안 패러게임에 참가하는 대한민국 선수단과 대회 관람객의 안전 및 편의를 지원하기 위해 관계기관 합동 준비단을 ... -
5억3900만 년 기후의 비밀 풀었다… “지구는 스스로 온도를 조절해 왔다”
▲ 기사의 이해를 돕기 위한 AI 생성 이미지 [사진=gemini 생성이미지] 지구는 지난 5억3900만 년 동안 빙하기와 초온난기를 반복하면서도 전체 평균기온을 일정 범위 안에서 유지해 온 것으로 나타났다. 국제 공동연구진은 암석 속에 남겨진 화학적 흔적과 첨단 기후모델을 결합해... -
서울시-메가MGC커피, 커피박 재활용 활성화 협약
▲ 왼쪽부터) 이호민 메가커피 CMO(chief marketing officer), 윤재삼 서울시 기후환경본부장 [사진=서울시] 서울시가 카페에서 발생하는 커피 찌꺼기인 커피박(커피를 추출한 뒤 남는 부산물)의 재활용 활성화를 위해 프랜차이즈 업계와 손을 잡았다. 서울시는 지난 7월 30일 ... -
상반기 신규 등록 차량 23%가 전기차…친환경차 395만 대 돌파
▲ 충전중인 전기차 [사진=ESG코리아뉴스] 국내 자동차 시장이 친환경차 중심으로 빠르게 재편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올해 상반기 신규 등록 자동차 4대 가운데 1대에 가까운 차량이 전기차였으며, 친환경차 누적 등록 대수는 처음으로 395만 대를 넘어섰다. ... -
지단, 프랑스 축구 새 사령탑 선임…한국은 감독 선임 논란에 청문회까지
▲ 프랑스축구연맹(FFF)이 프랑스 축구의 살아있는 전설 지네딘 지단을 국가대표팀 신임 감독으로 공식 선임했다. [사진=Pinterest] 프랑스축구연맹(FFF)이 29일(현지시간) 프랑스 축구의 살아있는 전설 지네딘 지단을 국가대표팀 신임 감독으로 공식 선임했다. 2026 북중미 월드컵...
전체댓글 0
NEWS TOP 5
실시간뉴스
추천뉴스
사람들
more +-
오바마 “책은 세상을 보는 방식을 바꾼다”…인생 바꾼 6권 다시 읽는다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이 자신에게 깊은 영향을 준 책들을 다시 펼친다... -
UN 인권사무소, 말리 원주민 지도자 우무 디코 조명… “기후 정의와 원주민 권리 향상에 앞장”
유엔 인권사무소(UN Human Rights)가 7일 저녁 공식 X 계정을 통해 말리 출... -
방사능 연구에 바친 삶… 과학계의 거장 ‘마리 퀴리’를 기리며
과학 계정 ‘월드 오브 사이언스(World of Science)’가 7일 공식 X를 통해 19... -
스크린 넘어 세계를 보살피는 연기파 배우, ‘UN 평화대사’ 샤를리즈 테론(Charlize Theron)의 삶과 헌신
할리우드를 대표하는 연기파 배우이자 인도주의 운동가인 샤를리즈 테론(Cha...
오피니언
more +-
[남재철의 기후&식량안보⑪] 폭염의 시대, 가장 낮은 곳에 시원한 희망을 전하다
올여름도 기록적인 폭염이 이어지고 있다. 폭염은 단순히 불쾌한 더위... -
[용석광의 컴플라이언스와 ESG] ㉕ 공정거래 자율준수 프로그램(CP):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에서 '사전 예방'으로의 패러다임 전환
사고가 터진 후에야 대책을 마련하는 '사후 약방문' 식의 대응은 오랜 기간 ... -
[용석광의 컴플라이언스와 ESG] ㉔ 산업별 공정거래법 위반 TOP 8: 우리 업종의 급소는 어디인가
공정거래법은 대한민국 모든 기업에 적용되는 기본 규범이지만, 실제 현장... -
[남재철의 기후&식량안보⑩] 기후가 휘두른 채찍, 복합재난에 대응해야 한다
올여름 지구촌 곳곳에서 기후위기의 새로운 얼굴이 나타나고 있다. 유...
기획 / 탐방
more +-
제5회 한국ESG경영 최고위과정, 홋카이도서 ESG 탐방 프로그램 진행
제5회 한국ESG경영 최고위과정이 지난 14일부터 17일... -
[인공지능 문명 리포트 ⑥] 기계는 왜 거짓말을 할까
인공지능이 인간의 언어를 이해하고 대화하는 시대... -
[기계가 일하는 세상 ⑩] 24시간 멈추지 않는 무인 생산라인…공장은 잠들지 않는다
공장은 오랫동안 인간 노동의 상징이었다. 거대한 기계 소리, 반복되는 조립 ... -
[ESG탐방] 지속가능한 도시의 미래를 전시하다… 상하이 도시계획전시관이 보여주는 도시 운영의 방향
상하이 도시계획전시관(Shanghai Urban Planning Exhibition Center)은 상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