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통항의 자유’ 흔들리며 에너지 안보·해상 질서 동시 위기
중동 분쟁의 여파가 이어지는 가운데, 이란이 호르무즈 해협 통제권을 협상 조건으로 공식 제기하면서 이번 사태는 단순한 지역 충돌을 넘어 국제 질서 전반의 균열을 드러내고 있다. 특히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 시기부터 약화되기 시작한 다자주의 체계가 이스라엘과의 충돌을 계기로 다시 시험대에 올랐다는 분석이 제기된다.
이번 사안의 핵심은 군사 충돌 자체가 아니라, 국제 규범에 기반한 ‘해상 질서’가 실제로 작동하는지에 대한 문제이다. 이란은 전쟁 종식을 위한 조건으로 ‘호르무즈 해협 주권 인정’을 요구하며 기존의 제재 완화 요구를 넘어 해상 통제 권한까지 협상 카드로 끌어올렸다. 이는 국제 해협의 성격을 근본적으로 흔드는 요구로 평가된다.
호르무즈 해협은 전 세계 석유와 액화천연가스(LNG)의 약 20%가 통과하는 전략적 요충지이다. 이 해협에서의 긴장은 곧바로 글로벌 에너지 가격과 공급망 불안으로 이어진다. 실제로 최근 충돌 과정에서 선박 운항이 위축되며 유가와 해상 운임이 동시에 변동성을 보였다.
문제는 이러한 긴장이 단순한 ‘분쟁 리스크’가 아니라, 국제 규범 자체의 약화와 맞물려 있다는 점이다. 트럼프 행정부는 과거 이란 핵합의(JCPOA)에서 일방적으로 탈퇴하며 다자 협력 체계를 흔든 바 있다. 이후 제재 중심의 일방적 압박 전략은 국제 협상의 틀을 약화시키고, 국가들이 규범이 아닌 ‘힘’에 의존하도록 만드는 계기가 됐다는 평가가 많다.
그 결과, 이번 사태에서 이란은 국제법적 논란이 예상됨에도 불구하고 해협 통제와 통행료 부과 가능성을 공개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이는 기존 질서에 대한 ‘도전’이라기보다 이미 약화된 질서 위에서 가능한 선택이라는 해석이 힘을 얻는다.
국제법적으로 호르무즈 해협은 ‘국제 해협’으로 분류되며 모든 국가의 자유로운 통항권이 보장된다. 유엔해양법협약(UNCLOS) 역시 이러한 원칙을 명시하고 있다. 그러나 규범이 존재하더라도 이를 강제할 정치적 합의와 신뢰가 약화될 경우 법은 실효성을 잃게 된다.
미국과 G7 국가들은 즉각 반발하며 ‘통항의 자유’를 강조하고 있지만, 과거와 같은 강력한 국제 공조가 형성되기 어려운 점도 분명하다. 글로벌 공급망이 다극화되고 각국의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힌 상황에서 단일한 대응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이란 내부에서는 해협 통과 선박에 대한 통행료 부과를 제도화하려는 움직임까지 나타나고 있다. 이는 해상 통로를 단순한 지리적 공간이 아닌 ‘경제적·정치적 자산’으로 전환하려는 시도로 해석된다. 동시에 특정 국가의 접근을 제한하거나 지정학적 갈등과 해상 이용을 연결하려는 새로운 형태의 압박 전략이기도 하다.
전문가들은 이번 사태를 단순한 중동 지역 갈등이 아니라 ‘국제 거버넌스의 붕괴 신호’로 보고 있다. 규범 기반 질서가 약화된 상황에서 전략적 요충지를 가진 국가가 이를 협상 카드로 활용하는 흐름은 앞으로 반복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결국 호르무즈 해협을 둘러싼 갈등은 하나의 질문으로 수렴된다. 국제 질서는 여전히 규칙에 의해 유지되는가, 아니면 힘의 균형에 의해 재편되고 있는가. 이번 사태는 그 답이 점점 후자에 가까워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로 해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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