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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에 축복을 싣고... 전통과 과학이 다시 발견한 당나귀의 가치

  • 윤재은 기자
  • 입력 2026.01.01 0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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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나귀 무리때가 초원에서 풀을 뜯고 있다. [사진=Leon Woods]

 

중남미의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면 거리에는 특별한 행렬이 등장한다. ‘라스 포사다스(Las Posadas)’라 불리는 이 전통 행사에서는 마리아와 요셉이 아기 예수를 낳을 곳을 찾아 여관을 전전하던 성경 속 여정을 재현한다. 촛불을 든 사람들 사이에서 빠지지 않는 존재가 있는데 바로 마리아를 태운 당나귀다. 수천 년 전 이야기 속 운송 수단이 오늘날까지도 축제의 중심에 놓이는 이유는 당나귀가 단순한 동물이 아니라 인간의 삶과 생존을 함께 떠받쳐 온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징성은 최근 과학 연구를 통해 현실적인 의미를 다시 얻고 있다. 기후 변화가 가속화되면서 인간과 동물이 맺어 온 오래된 협력 관계가 재조명되고 있는데 그 중심에 당나귀가 있다.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UCL) 연구진을 비롯한 해외 학자들은 기후 위기 속에서 당나귀가 인간의 적응 능력을 높이는 핵심 동물 중 하나라고 평가한다.


대표적인 사례는 케냐 북부와 소말리아 남부의 건조 지역이다. 이곳에서는 극심한 가뭄이 반복되면서 물과 식량을 확보하는 일이 생존의 문제로 직결된다. 연구자들에 따르면, 주민들은 당나귀를 이용해 수십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물과 식량을 운반한다. 평소에는 소나 낙타도 짐을 나를 수 있지만 가뭄과 폭염이 겹친 상황에서는 당나귀가 가장 신뢰할 수 있는 동물로 남는다.


그 이유는 당나귀의 독특한 생리 구조에 있다. 당나귀의 소화 시스템은 물이 충분할 때는 수분을 효율적으로 흡수하고 부족할 때는 체내에 오래 유지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연구자들은 이를 “내장형 저장 장치”에 비유한다. 이 덕분에 당나귀는 물을 거의 마시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오랜 시간 이동하며 짐을 나를 수 있고 인간은 그 등에 생존에 필요한 자원을 실어 나를 수 있다. 기후 변화로 극단적인 환경이 늘어나는 시대에 이 능력은 단순한 장점이 아니라 생존 전략으로 평가된다.


당나귀의 가치는 인간 사회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생태계 차원에서도 이 동물은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일반적인 초식 가축은 특정 식물을 집중적으로 뜯어먹어 토양을 황폐화시키고 침식을 유발하기 쉽다. 반면 당나귀는 먹이 선택 폭이 넓어 한 종의 식물만 과도하게 줄이는 경향이 적다. 최근 튀니지 연구진이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지중해 지역의 당나귀들은 외래종 식물을 선호하는 경향을 보였고 이는 토착 식물들이 다시 자랄 공간을 확보하는 데 도움을 주는 것으로 나타났다. 당나귀가 일종의 ‘자연 관리인’처럼 작동하며 생물다양성 유지에 기여하고 있다는 평가다.


더 나아가 당나귀는 인간과 동물의 건강을 위협하는 문제에서도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준다. 기후 온난화로 진드기와 같은 곤충의 서식지가 확대되면서 진드기 매개 질병 역시 빠르게 늘고 있다. 그런데 미국 매사추세츠대학교 애머스트 캠퍼스 연구진은 당나귀의 피부에서 진드기가 기피하는 화학 물질이 자연적으로 분비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이 물질을 말의 피부에 적용했을 때 진드기가 거의 달라붙지 않았다는 실험 결과도 보고됐다. 연구자들은 이 성분이 기존 화학 살충제보다 환경 부담이 적은 천연 기피제로 발전할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있다.


이처럼 당나귀는 기후 변화, 생태계 관리, 질병 예방이라는 현대 사회의 핵심 과제들과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연결돼 있다. 『네이처(Nature)』를 비롯한 국제 학술지와 해외 보고서들이 공통적으로 강조하는 점은 인간이 오랫동안 ‘느리고 투박한 노동 동물’로만 여겨왔던 당나귀가 사실은 매우 정교한 적응 능력을 지닌 존재라는 사실이다.


라스 포사다스 행렬 속 당나귀는 축복과 겸손의 상징이지만 오늘날 과학의 시선 속에서 당나귀는 그 이상이다. 극단적인 기후 환경에서 인간의 생존을 돕고 훼손된 생태계의 균형을 지탱하며, 질병 위험을 줄일 실마리까지 제공하는 존재다. 등에 축복을 싣고 걷는다는 오래된 표현은 이제 은유가 아니라 과학적으로도 설명 가능한 현실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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