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극 반도의 헥토리아 빙하(Hektoria Glacier)가 인류 역사상 유례없는 속도로 후퇴하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며 전 세계 과학자들에게 경고음을 울리고 있다.
최근 학술지 네이처 지오사이언스(Nature Geoscience)에 발표된 연구에 따르면 헥토리아 빙하는 불과 두 달 만에 약 8킬로미터(5마일)나 물러난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현대 관측 역사에서 ‘육지에 닿아 있는 빙하’가 기록한 가장 빠른 후퇴 속도다.
이번 연구를 이끈 미국 콜로라도 볼더 대학 지구관측센터의 테드 스캠보스(Ted Scambos) 수석연구원은 외신과의 인터뷰에서 “이 정도 속도는 정말 놀라울 정도”라며 “빙하가 이런 속도로 무너지는 것은 전례가 없다”고 밝혔다. 헥토리아 빙하는 남극 반도의 해안가에 위치해 있으며, 이 지역은 지구상에서 가장 빠르게 온난화가 진행되는 곳 중 하나로 꼽힌다.
연구진은 헥토리아 빙하의 급격한 후퇴가 단순히 기온 상승 때문만이 아니라 빙하 아래의 지형적 조건과 주변 해빙의 붕괴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라고 분석했다. 헥토리아는 ‘빙하 평원(ice plain)’ 위에 놓여 있는데 이는 해저의 평평한 퇴적물 위에 얼음이 얇게 떠 있는 구조다.
이처럼 불안정한 지형에서는 빙하가 얇아지면 부력이 커지면서 해수면 위로 떠오르게 되고 해수가 빙하의 균열 속으로 밀려들며 압력을 높인다. 이로 인해 ‘분리(caving)’ 현상이 일어나 거대한 얼음덩어리가 떨어져 나가게 된다.
연구진은 이러한 과정을 “도미노처럼 뒤로 하나씩 쓰러지는 것”에 비유했다. 한 번 빙하의 앞부분이 떨어져 나가면 그 뒤의 얼음도 같은 압력에 노출되어 연쇄적으로 무너진다는 것이다. 실제로 헥토리아 빙하가 후퇴하기 직전 그 주변의 ‘고정 해빙(fast ice)’이 붕괴하면서 빙하를 지탱하던 보호막이 사라진 것으로 확인됐다.
과학자들은 이 현상이 단순한 지역적 사건이 아니라 지구 전체 해수면 상승에 심각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경고했다. 남극 대륙에는 해수면을 약 59미터까지 높일 만큼의 얼음이 존재한다. 따라서 헥토리아처럼 비교적 작은 빙하조차도 급격히 붕괴한다면 그보다 훨씬 거대한 빙하가 같은 과정을 겪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연구 공동 저자인 스캠보스는 “헥토리아는 남극의 거대한 빙하들의 작은 사촌일 뿐이며 비슷한 조건의 다른 빙하들도 같은 운명을 맞을 수 있다”고 경고했다.
기후 변화의 가속화는 이러한 불안정성을 더욱 키우고 있다. 뉴캐슬 대학교의 빙하 지질학자 베선 데이비스는 “헥토리아 인근의 해빙 감소는 해수 온난화와 직결되어 있다”며, “해빙이 줄어들면 파도와 조류가 빙하를 직접 공격하게 되어 붕괴 속도가 더 빨라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영국 남극 조사국의 해양지구물리학자 롭 라터 또한 “이번 연구는 남극 빙하가 얼마나 빠르게 후퇴할 수 있는지를 새롭게 보여준 사례”라며, “빙하와 빙붕 아래의 공동(cavity)은 지구에서 가장 접근하기 어려운 환경 중 하나지만 이곳의 변화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해수면 상승을 정확히 예측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결국 이번 헥토리아 빙하의 붕괴는 단순한 자연 현상이 아니라 기후 위기로 인한 환경 불안정성의 실체를 보여주는 경고이다. 인간이 산업화 이후 배출한 온실가스가 대기와 해양의 온도를 높이고 그 영향이 극지방의 빙하 구조를 무너뜨리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지구의 가장 외딴 지역에서 벌어지는 일은 머지않아 해수면 상승, 기상이변, 생태계 붕괴 등으로 우리의 일상 속에 직접적인 위협으로 돌아올 수 있다.
전문가들은 앞으로의 과제가 명확하다고 말한다. 남극의 어떤 지역이 이런 급격한 후퇴에 취약한지 더 면밀히 분석하고 해수 온도와 해빙의 변화, 지형적 조건을 종합적으로 감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대기 온도 상승을 억제하는 수준의 대응만으로는 부족하며 지구 시스템의 ‘구조적 붕괴 가능성’을 전제로 한 보다 적극적인 기후정책이 필요하다.
헥토리아 빙하의 몰락은 인류가 이미 임계점 가까이에 도달했음을 상기시킨다. 인류는 이제 지구가 얼마나 빠르게 반응할 수 있는지를 실제로 목격하고 있으며, 이 변화의 속도에 맞춰 대응하지 못한다면 다음은 ‘빙하’가 아닌 ‘우리의 터전’이 사라질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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