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세계 곳곳에서 분쟁이 장기화되고 격화되면서 인류는 다시금 기아의 위협 앞에 서 있다. 유엔 산하 세계식량계획(WFP)과 식량농업기구(FAO)가 발표한 최근 보고서에 따르면 2024년 전 세계에서 약 2억 9천5백만 명이 ‘급성 식량 불안정(acute food insecurity)’ 상태에 놓였다.
이는 전년보다 1천3백만 명 이상 늘어난 수치로, 식량 위기가 6년 연속으로 심화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특히 식량이 불안정한 인구의 약 70%는 분쟁이나 취약한 정세로 고통받는 국가에 거주하고 있다.
이 같은 수치는 단순한 통계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수단, 시리아, 예멘, 콩고민주공화국 등지에서 벌어지는 전쟁과 내전은 수많은 사람들을 고향에서 내쫓고 경작지와 시장 및 생계 수단을 파괴하고 있다. 갈등은 단순히 폭력과 피난민을 낳는 것이 아니라 식량 생산과 유통 그리고 지원 체계를 무너뜨려 굶주림을 구조적으로 심화시키고 있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2018년 결의안 2417호를 통해 “기아를 전쟁의 무기로 사용하는 행위”를 공식적으로 규탄했다. 이는 전쟁이 단지 정치적 분쟁을 넘어 인도주의적 위기로 확장되고 있음을 인정한 조치였다. 그러나 현실은 여전히 냉혹하다.
가자지구에서는 봉쇄와 폭격으로 식량 공급망이 붕괴되어 인구의 90% 이상이 급성 식량 불안정 상태에 놓였고 34만 명 이상이 ‘재앙적 기아’ 단계(IPC 5단계)에 이르렀다는 유엔 보고가 나왔다.
수단 역시 전 세계에서 가장 심각한 인도적 위기로 평가되고 있으며 약 2천5백만 명이 극심한 기아 상태에 있다. 콩고민주공화국에서는 내전과 무력 충돌로 2,800만 명이 굶주림에 직면하고 있다.
갈등이 굶주림을 유발하는 경로는 명확하다. 폭력은 농업 생산을 중단시키고 전투는 시장과 도로를 막아 식량의 이동을 차단한다. 지원단체들은 전장 접근이 불가능해 구호 활동을 펼치지 못하며 일부 지역에서는 식량과 물이 의도적으로 차단되기도 한다.
이런 상황에서 주민들은 생존을 위해 고향을 떠나지만 피난지에서도 식량 접근은 극도로 제한된다. 게다가 기후변화로 인한 가뭄과 홍수 및 경제 위기와 인플레이션이 겹치면서 상황은 더욱 악화되고 있다.
이러한 악순환을 끊기 위해선 무엇보다 ‘평화’가 필요하다. 안정 없이는 기아 제로(Zero Hunger)를 달성할 수 없으며, 이는 세계식량계획(WFP)이 강조하는 핵심 명제이기도 하다. WFP와 스톡홀름 국제평화연구소(SIPRI)가 공동으로 진행한 연구에 따르면 식량 지원과 지역사회 회복 프로그램이 평화 전망을 개선하는 데 실질적인 효과를 보였다. 물과 토지 같은 자원 접근을 확대하고 지역사회 간의 갈등을 완화하며 청년과 여성의 참여 기회를 늘리는 것이 평화를 향한 첫걸음이자 기아 해소의 조건이라는 것이다.
또한, 국제사회는 인도적 지원 접근성을 보장하고 식량 시스템의 자립성을 강화해야 한다. 단순한 구호물자 전달이 아니라 지역 농업 회복과 생계 기반 복구, 그리고 국가와 시민 간의 신뢰 회복이 필요하다. 기아는 단순한 결핍이 아니라 제도와 사회 구조의 붕괴에서 비롯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2020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WFP는 “기아 퇴치를 위한 노력과 분쟁 피해 지역의 평화 조건 개선에 기여한 공로”로 인정받았다. 그러나 그 이후에도 세계 곳곳의 분쟁 지역에서는 여전히 식량이 전쟁의 수단으로 이용되고 있다. 갈등을 끝내고 굶주림을 막는 것은 단지 인도주의적 과제가 아니라 인류의 지속 가능한 미래를 위한 근본적 선택이다.
전쟁을 멈추지 않는 한 기아는 멈추지 않는다. 평화가 회복될 때 비로소 식량은 무기가 아닌 생명의 상징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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