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이 다 지나가는 12월, 미국은 다시 한 번 ‘마약과의 전쟁’이라는 오래된 이야기의 새로운 장을 열고 있다. 그러나 이번 전쟁은 과거와는 성격이 완전히 다르다. 1970년대 리처드 닉슨 대통령이 선언했던 은유적·정책적 의미의 전쟁이 아니라 실제 무력과 폭발, 군사 작전이 동원되는 실질적인 전쟁에 가깝기 때문이다.
미국은 최근 몇 달 동안 라틴 아메리카와 카리브해 인근에서 마약 밀매 조직의 선박을 직접 공격하는 군사 작전을 펼쳐왔다. 트럼프 대통령 2기 행정부가 ‘마약 테러리스트’라고 규정한 세력들을 대상으로 공습을 실시했고 미군은 마약 운반선으로 지목된 배들을 폭파했다. 일부 공격에서는 선박이 침몰한 뒤 생존자에게 다시 공격을 가했다는 의혹까지 제기되어 국제적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이러한 군사적 공세는 미국의 마약 정책사에서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캔자스 대학의 역사학자 데이비드 파버 교수는 이를 “마약과의 전쟁이 은유가 아닌 실제 전쟁이 된 순간”이라고 평가한다. 그는 기존의 마약 전쟁이 사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단속과 처벌 중심이었다면, 지금의 전쟁은 명백히 사법 외적, 군사적 성격을 띤 새로운 국면이라고 지적한다.
닉슨에서 트럼프까지, 긴 여정 속의 정책 변화
1970년대 닉슨 대통령은 미국 내 마약 사용 증가와 그에 따른 사회불안을 우려하며 마약을 국가적 위협으로 규정했다. 당시의 전쟁은 해외 공급 차단과 동시에 국내 사용자와 딜러에 대한 강력한 처벌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이후 수십 년 동안 미국의 마약 정책은 ‘공급 억제’와 ‘수요 억제’ 사이를 오가며 균형을 찾으려 했지만 결국 과도한 투옥과 인종적 불평등 등 큰 부작용을 낳았다.
2000년대 이후에는 교육·재활·공중 보건 중심의 접근법이 주목받기 시작했고 특히 오피오이드 위기가 폭발한 이후에는 사용자를 범죄자가 아닌 치료 대상자로 보는 관점이 확산되었다. 이러한 흐름은 트럼프 대통령 1기 임기 중 형량 완화를 포함한 ‘퍼스트 스텝 법(First Step Act)’ 통과로 이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는 이번 행정부에서 급선회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마약 문제를 다시 외부로부터의 위협이자 안보 현안으로 규정하면서 공급자 원천 차단에 국가 역량을 집중하고 있다. 과거 조지 H.W. 부시 행정부가 검토만 했던 선박 격침 작전이 실제로 시행된 것이 바로 그 예다.
베네수엘라를 둘러싼 군사적 긴장
이번 작전에서 특히 주목되는 점은 미국이 마약 문제를 특정 국가 특히 베네수엘라에 대한 압박 수단으로 활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미국 정부는 베네수엘라 정부를 마약 카르텔과 결탁한 정권으로 규정하며 강경한 외교·군사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베네수엘라 인근 해역에 전투함을 배치하고 정보를 이유로 공격을 정당화하는 방식은 20세기 초반 미국의 ‘총포 외교’(gunboat diplomacy)를 연상시킨다.
과거에도 미국은 라틴 아메리카에서 마약 문제를 명분으로 다양한 정보·군사 작전에 개입해 왔지만, 이번처럼 동맹국의 지원 없이 단독으로 치명적인 군사력을 사용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파버 교수는 이를 “마약 전쟁을 넘어선 새로운 형태의 강압 외교”라고 평가한다.
다시 살아난 전쟁, 해결되지 않은 문제
아이러니하게도,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많은 사람들이 마약과의 전쟁은 사실상 끝났다고 생각했다. 대마초 합법화, 수감자 감형, 공중 보건 중심 접근은 마치 과거의 실패한 전쟁에서 벗어나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가는 듯 보였다.
그러나 수요는 사라지지 않았다. 새로운 합성 마약이 유입되고 오피오이드 위기는 악화일로였다. 공급을 막으면 다른 약물이 등장하고 한 종류의 약물을 성공적으로 단속하면 새로운 시장이 열리는 악순환은 그대로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트럼프 행정부는 다시 공급 측 억제에 집중하는 강경책으로 회귀했다. 문제는 그것이 단순한 단속이 아니라 군사 행동이라는 점이며, 그 결과가 과연 미국 내 마약 문제 해결로 이어질지 여부는 여전히 불확실하다.
전쟁인가? 정치인가?
마약 문제는 항상 강력한 정치적 상징성을 지녀왔다. 닉슨 시절부터 정치인들은 마약을 사회의 불안과 연결시키며 강한 조치를 내세우는 방식으로 지지층을 결집했다. 이번 트럼프 행정부의 공격적 접근 역시 단지 정책적 판단뿐 아니라 정치적 전략의 측면도 존재한다는 분석이 나온다.
파버 교수는 “마약 문제 해결에는 공중 보건적 접근이 필수적이지만, 정치에서는 마약을 외부의 적으로 설정하는 방식이 더 큰 효과를 낸다”고 말한다. 마약 카르텔을 ‘테러 조직’으로 규정한 이번 서사는 바로 그런 정치적 효과를 극대화하는 전략이기도 하다.
마약 전쟁의 새로운 시대
오늘날 미국이 베네수엘라 인근에서 펼치는 마약 퇴치 작전은 기존 ‘마약과의 전쟁’의 연장선이면서도 완전히 새로운 형태를 띤다. 이는 더 이상 마약 사용자를 잡아 가두는 국내 정책이 아니라 국가 간 군사적 긴장을 동반한 국제 안보 전략이다.
이 새로운 전쟁이 마약 문제 해결로 이어질지 아니면 또 다른 국제적 갈등과 인권 문제를 낳을지 이는 앞으로 미국이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달려 있다.
마약 전쟁의 역사가 보여주듯 하나의 문제를 전쟁으로 치환하는 방식은 언제나 예상치 못한 결과를 낳아왔다. 그리고 지금, 미국은 그 역사적 실험을 또다시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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